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티시 캐넌의 기고글인 '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는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와 같은 말이 아닌가’(Why 'Father, forgive them' isn't the same as 'I forgive you')를 8월 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티시 캐넌은 작가이자 강연가이며 ‘트루 컴포트(True Comfort) 팟캐스트’의 진행자이다. 그는 평생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향한 건강하고 지속적인 헌신을 세워가도록 돕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신 가장 어려운 명령 가운데 하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학대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이다.

이 부르심은 그 ‘원수’가 단지 나를 짜증 나게 하거나 실망시키고 오해한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 아무런 뉘우침도 없이 무정하고 잔인하게 나를 짓밟은 사람일 때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문제 앞에서 종종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본보기로 바라보라는 권면을 받는다. 누가복음 23장 34절은 흔히 예수님께서 극심한 학대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들을 용서하셨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도 그와 똑같이 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내용은 정말 그런 뜻일까? 배신당하고, 거짓 고발을 받고, 조롱과 구타와 채찍질을 당한 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순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놀랍다. 그분은 원수들을 저주하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즉각적인 심판이 임하기를 구하지도 않으셨고, 자신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돌려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지도 않으셨다. 대신 그들을 위해 중보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 차이는 작지 않다.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이 기도를 상대방의 회개와 상관없이 개인적 용서를 선언하신 예수님의 모범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본문이 직접 보여주는 장면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용서 선언이라기보다 원수를 위한 중보기도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계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방식

이 장면을 곧바로 ‘조건 없는 인간관계적 용서’의 근거로 읽는 데 신중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하게 계시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고 하셨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 사람들이 자신과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죄 용서의 길을 여셨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용서를 실제로 받아 누리는 일을 회개와 믿음과 긴밀하게 연결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메시지는 “하나님께 돌아오든 말든 이미 모두 용서받았다”가 아니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완전하게 보여주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갑자기 자신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셨다고 보기보다는, 그분이 이미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원수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고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자신이 가르치신 말씀을 몸소 살아내신 예수님

그렇다면 누가복음 23장 34절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길을 먼저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이 전한 말씀을 반복하신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을 실제로 살아내셨다. 십자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그분을 채찍질했고, 못을 박았으며, 조롱하고 모욕했다. 예수님이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그들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을 구하셨다.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목이었다.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창조주와 화목하게 되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예수님의 기도는 악을 가볍게 여기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을 행한 자들이 심판 아래 머물지 않고 회개와 자비로 나아가기를 바라신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다시 가까워지는 것은 다르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안전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를 파괴하려 했던 사람에게 다시 무제한적인 접근권을 허용하거나, 학대가 반복될 것이 분명한 환경으로 돌아가거나, 자신의 약점을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취약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성경은 사랑뿐 아니라 분별도 명한다. 때로는 지속적으로 악을 행하거나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사람의 열매를 보고 분별하라고 권면한다(마 7:6; 롬 16:17; 딤후 3:1~5; 딛 3:10).

사랑은 반드시 접근을 허락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용서와 신뢰도 동일하지 않다. 용서와 관계 회복 역시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특히 기도는 물리적인 가까움이나 즉각적인 화해, 지속적인 접촉을 요구하지 않는다.

기도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동시에,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쏟아놓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울 때에는 이렇게 단순하게 기도할 수도 있다: “하나님 아버지, 저들의 악을 막아 주십시오. 저들을 회개로 이끌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시오. 저들이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도록 제 마음을 붙들어 주십시오.” 따뜻한 감정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이러한 기도는 사랑의 한 모습일 수 있다.

결코 쉬운 명령이 아니다

많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실제적인 악을 경험한다. 필자 역시 그러했다.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초기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인 성적 착취와 학대를 겪었고, 이후에는 정서적·심리적·영적 학대까지 경험했다.

필자의 마음을 깊이 무너뜨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시기도 있었다. 어떤 때에는 그런 기도 자체가 또 다른 폭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자신을 해친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실 수 있는가?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분 자신이 먼저 그 길을 걸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배신과 거짓 고발, 폭력과 공개적 수치, 고문과 죽음을 당하셨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을 해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모든 것을 ‘용서’라는 한 단어로 묶지 말라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서로 다른 순종의 행위들을 ‘용서’라는 하나의 단어 안에 모두 집어넣는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은 일들을 구별해서 보여준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자신을 학대한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 복수심을 내려놓는 것, 궁극적인 정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 마음속에 쓴 뿌리가 자라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 상한 마음의 치유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 등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용서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눅 17:3) 이 가르침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그의 회개와 구원을 소망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서로 구별해서 가르치신 것들을 모두 하나의 ‘용서’라는 개념으로 합쳐서는 안 된다.

특히 피해자에게 그러한 구분 없이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 용서를 오히려 왜곡할 위험이 있다.

상대가 회개하지 않아도 치유의 길은 열려 있다

상대방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고 해도 피해자가 치유와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해자가 변할 때까지 꼼짝없이 붙들려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상한 마음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쓴 뿌리를 그분 앞에 내려놓을 수 있다. 치유를 구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정의와 결과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리며 진실을 빛 가운데 드러내 달라고, 악을 멈추어 달라고, 그에게 회개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 기도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눈물 속에서 간신히 꺼내놓은 몇 마디일 수도 있다. 큰 대가를 치르며 드리는 기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해친 사람의 파멸보다 회개와 구원을 바라는 방향으로 조금씩 마음을 움직여 갈 수 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용서보다 덜 중요한 순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깊이 동참하는 길이며, 복수와 증오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반문화적인 사랑을 드러내는 강력한 증언이 될 수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용서한다”고 선언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때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순종 역시 바로 그 기도에서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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