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무도 그가 소원하는 것을 빼앗을 수 없으니, 이는 그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그의 모든 소원이 오직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일한 소원에 따라 그의 인생에는 단 하나의 목적이 있으니, 곧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다. 그러면 ‘완전한 자’란 어떠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가? 우리가 뜻하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는 자’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이며,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깨끗해진 자,’ 즉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는 자’요, 따라서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에서 말한 ‘온전한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신실하신 말씀, 곧 ‘내가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겔 36:25),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에서 구원하리라’(겔 36:29)고 하신 그 약속이 삶 속에서 이루어진 사람이다.
존 웨슬리 - 그리스도인의 완전
만일 누가 기도를 단지 자기 양심의 깊은 곳의 성찰, 또는 더 나은 것을 찾으려는 영혼의 깊은 독백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는 아직 참된 기도와는 거리가 멀며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아직 문밖에 있거나 기껏해야 문지방에 서 있을 뿐이다.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는 아직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성소를 지나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자아와 자아에 속한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영혼의 깊은 감정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 그는 아직 지성소에도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그곳에는 우리와 완전히 구별되시며 천사들의 우두머리보다도 높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부르기를 바라신다. 여기에 기도의 출발점이 있다. 우리 내면의 상태가 아무리 성화되고 깊어졌다 해도 하나님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분이심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과 사랑 앞에 서면 그분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그 분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에버하르트 아놀드 & 리처드 포스터 -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기도
성 바울부터 콘스탄티누스의 회심까지 우리가 이름을 댈 수 있는 선교사는 오직 두 명뿐이다. 선교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며, 선교는 신적 파송자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다.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것에 우리 삶을 순종할 때, 우리는 우리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을 보도록 인도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 이야기를 보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고린도전서 11~14장은 서로 동떨어진 가르침이 아니라, 가정의 식탁에서 이루어진 통일된 예배 행위에 대하여 연관되며 통합되는 통일된 모습을 제시한다. 기독교인의 진리 구현은 기쁨이 넘치는 자유로운 선택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살아내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것을 설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위대한 것을 살아낸다. 예배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나누고, 기념하고, 계속하는 것이다.
알랜 크라이더 & 엘리노어 크라이더 - 기독교 세계 이후, 예배와 선교를 다시 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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