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애런 그레이엄 목사의 기고글인 '사담 후세인의 꿈은 초자연적 믿음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Saddam Hussein's dreams and the case for supernatural faith)를 6월 2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애런 그레이엄은 미국 워싱턴 D.C. 중심부에 위치한 활기찬 다민족 공동체인 더 디스트릭트 처치의 설립자이자 담임목사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 거짓의 문화 속에서 굳게 서는 법』의 저자이며,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공공정책 석사 학위를,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가 처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은 열 살 때였다.
당시 필자의 가족은 선교사로서 쿠웨이트에 머물고 있었는데, 걸프전쟁이 발발하며 사담 후세인의 군대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우리는 인질로 잡혔다. 참으로 끔찍한 시간이었다. 필자와 어머니, 형제는 6주 만에 무사히 풀려났지만, 아버지는 그 후로도 3개월이나 더 인질로 잡혀 있어야만 했다.
당시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애타게 기도하고 있었다. 특히 전 세계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를 모았던 어느 한 주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담 후세인이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기괴한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훗날 그는 신이 자신의 영혼을 심히 괴롭혔다고 고백했다.
그 무렵 후세인은 서방 국가 출신의 인질들을 붙잡아 이라크와 쿠웨이트 전역의 군사 시설에 '인간 방패'로 세워두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기 중이던 50만 명이 넘는 미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그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전술이었다. 하지만 악몽으로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후, 후세인은 내각을 경악하게 만든 지시를 내렸다. 인질들을 전원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다음 날, 아버지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수년이 흐른 뒤에도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은 후세인이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도무지 설명하지 못했다. 훗날 아버지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역시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다. "후세인이 왜 인질들을 풀어주었는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다. 하지만 덕분에 쿠웨이트 침공 결정을 내리기가 훨씬 수월해졌죠."
대통령은 몰랐지만, 필자는 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후세인의 잠을 깨우고 그의 영혼을 뒤흔드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사,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지도자 중 한 명의 굳은 마음을 움직이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여기에는 그 어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도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세상에는 그저 초자연적일 수밖에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필자는 침례교 환경에서 자라며 소위 '진리(truth)'의 진영에 굳건히 뿌리를 내렸다. 우리끼리는 농담 삼아 "우리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경(Holy Bible)'을 믿는다"고 말하곤 했다.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님은 그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문맥에서만 조심스럽게 언급될 뿐, 삶과 사역에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우리는 리더십, 대접, 구제와 같은 '섬김의 은사'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웠지만, 신유(치유)나 방언, 예언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나 표적과 기사에 대해서는 전혀 배우지 못했다.
필자는 나의 침례교적 뿌리와 그곳에서 배운 견고한 성경적 기반에 깊이 감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 모든 것의 충만함을 온전히 경험하고 싶은 깊은 갈망이 있다.
진실: 초자연적인 차원이 존재한다
예수님은 그분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거대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땅끝까지 가라고 명령하셨다(마태복음 28:19-20).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심오한 약속을 남기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요한복음 14:12)
기독교의 본질은 그 중심에서부터 완벽히 초자연적이다. 우리 신앙의 기초 자체가 '기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부활'이다. 사도 바울은 이를 명확히 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린도전서 15:14).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과학이나 인간의 설명을 뛰어넘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위험한 상황에서의 기적적인 보호하심, 기도에 대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응답, 전혀 뜻밖의 재정적 공급, 의학을 넘어선 육체의 치유, 혹은 산산조각 났던 관계의 기적적인 회복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일들이 항상 이성적으로 딱 떨어지게 설명될 수는 없지만,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이다. 모든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한 간증이 있다. 최소한, 모든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기적적인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는가.
바울은 이성적인 설득을 넘어 하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렇게 썼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린도전서 2:4-5).
예수님 또한 이를 정확히 알고 계셨다.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한복음 4:23)
참된 예배는 머리와 가슴을 모두 동원해야 하며, 이 둘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믿음은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이성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3)
하나님의 증거는 이렇다. 그분은 이성을 모순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초월'하신다.
예수님은 신성한 신비와 이성적 진리를 완벽한 조화 속에 담아내신 분이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자(영), 완전한 인간이시다(성육신). 역사적으로 철저히 입증된 그분의 부활은 인간의 얄팍한 논리를 거스르지만, 우리 신앙의 가장 든든한 중심에 서 있다. 이는 하나님의 실재가 인간의 이성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우리의 결단: 성령 안에서 걷기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초청은 아주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회의주의가 팽배해져 가는 이 시대 속에서, 당당히 '성령 충만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회의적인 지식인 신자들은 종종 내적 갈등에 빠진다. 지적인 온전함을 잃을까 두려워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무의식적으로 밀어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머리와 가슴 중 굳이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음을 삶으로 보여주셨다. 그분의 삶과 사역 안에서 이성과 계시는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며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성령 충만한 삶의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맹렬한 갈망에 있다. 그리고 이 은사는 선택받은 극소수만을 위한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내어드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이미 완벽하게 다듬어진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다. 기꺼이 헌신하려는 마음, 즉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마음껏 무장시키실 수 있는 활짝 열린 마음을 찾으신다. 영적 은사는 뒷짐을 지고 수동적으로 관찰한다고 해서 발견되지 않는다. 오직 팔을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섬길 때 비로소 드러난다. 영적 은사는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주어지는 거룩한 도구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러한 은사들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나타남의 은사): 예언, 방언, 신유(치유), 지식의 말씀, 능력 행함, 믿음, 영들 분별함
◆로마서 12장 (섬김의 은사): 긍휼, 대접, 다스림(행정), 구제, 위로(권면)
◆에베소서 4장 (지도력 은사):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건강하게 역동하는 교회는 이 모든 은사들을 아낌없이 활용한다. 건강하게 성장하는 성도라면 이 중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은사를 삶 속에서 발휘하며 살아간다. 어떤 은사를 받을지 스스로 고를 수는 없지만, 내게 주어진 그 은사를 '사용할지 말지'는 온전히 당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고린도전서 14:1).
만약 아직 자신의 영적 은사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라. 성경이 이 은사들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깊이 연구하라. 당신의 영적 분별을 도와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교회 지도자들과 경건한 동역자들의 조언을 구하라. 성령님은 당신에게 좋은 은사 주시기를 그 누구보다 기뻐하시며, 당신이 그 은사 안에서 힘차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크게 즐거워하신다.
초대교회 시절에도 초자연적인 역사를 은근히 밀어내고 거부하려는 유혹이 있었음을 바울은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강력히 경고했던 것이다.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린도전서 14:39).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힘과 지혜만으로는 지상 대명령을 결단코 완수할 수 없음을 아셨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한복음 20:22)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곧 다가올 거대한 폭발에 대한 예고편에 불과했다. 마침내 오순절날, 성령의 폭포수 같은 부어지심은 요엘 선지자의 오랜 예언이 마침내 성취되는 위대한 시작점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사도행전 2:17; 요엘 2:28) 그 놀라운 성령의 부어지심은 멈추지 않고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영광의 날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신앙의 모든 것이 반드시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되어야만 한다는 얄팍한 거짓말은, 우리로 하여금 제자도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과 치열하게 씨름하게 만든다.
나는 성령님에 대해 참으로 무엇을 믿고 있는가? 성령님은 그저 멀리 있는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인가, 아니면 매일 아침 내 차가운 영혼을 일깨워 그리스도를 향해 뛰게 하시는 살아계신 인격이신가? 나는 그분이 내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마음껏 사용하기를 간절히 사모해 왔는가? 나는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상 속에서 기적을 베푸심을 진짜로 믿는가?
이것은 결코 한가한 신학적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우리가 빚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결정짓는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거부하는 것은 곧 능력 잃은 무기력한 종교 생활에 안주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그러나 성령께 내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내어드리고 굴복하는 것은, 예수님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의도하셨던 진짜 삶의 무대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것은 날마다 경이로움으로 가득하고, 흔들림 없는 목적이 살아 숨 쉬며, 감당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충만한 위대한 삶이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