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한평우 목사

서방 교회와 동방 정교회, 그리고 꼽틱 교회에서, 한결같이 존경받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콘스탄틴(Constantinus,272-337)대제다.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250년 동안 핍박하던 기독교에 자유를 주었고, 탈취했던 모든 재산을 돌려줌으로 자유를 향유하게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공화정부터 1천 년 동안 지켜왔던 종교적 관습을 단숨에 허물어 버린 놀라운 사건이었다. 더 나아가서 신전에 종사함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전국의 무수한 신전 공무원들을 해고해야 하는 시민적 저항이 큰 일이었다.

로마 제국은 전통적으로 캄피돌리오에 세워진 이 교도(유피테르)신을 섬겼다. 즉, 1대 왕, 로물루스가 이 캄피돌리오 언덕에 기도하던 중, 해 뜨기 전 신탁을 받았다고 전해 진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났고, 로물루스를 왕으로 세우라는 신탁을 받음으로 로마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원로원과 모든 귀족들이 검증없이 당연하게 여겨 왔다. 무려 1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을 말이다.

그런데 그 거룩한 전통을 일시에 뒤엎은 사람이 바로 콘스탄틴 대제다. 그것도 로마에 거주하는 대신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 거주할 뿐 아니라,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건설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는 폰테 밀비오에서 로마의 황제 막센티우스와 치열한 전투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 전투는 목숨을 건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볼 때 중과 부적이었고 승산이 없었다.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자신의 군대보다 세 배 이상 많았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벌어질, 312년 10월 28일, 새벽이 동터오도록 콘스탄틴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전투에 패하게 될 때, 본인은 물론, 가족 모두가 몰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도와주셨고 막센티우스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제일 먼저 행한 일이 313년,동방의 황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이었는데, 그 순간이야말로 기독교 역사의 변곡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 칙령은 음습한 카타콤베에서 피골이 상접한 채로 살아가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이었으나 훨씬 많은 전 로마의 이교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시민들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당시 어머니 헬레나 여사는 80세나 된 할머니이었으나, 멈출 수 없는 신앙의 열정으로 성지를 다녀왔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다양한 기독교 유물들을 모아 로마로 가져왔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황제의 어머니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유물 중 하나가 산타 스칼라(Santa Scala)이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받기 위해 오르셨던 28개의 대리석 계단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현재도 그 계단을 무릎 꿇고 회개하며 올라가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도 무릎 꿇고 올라간다.

어머니가 성지 순례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효심 많은 콘스탄틴 대제는 로마를 방문했다. 장례를 위해서, 그리고 로마 황제들이 전통적으로 찾는 캄피돌리우스를 찾았다. 그곳에는 로마 제국이 전통적으로 섬겨오는 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곳이다.

그때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1천년 동안 지켜오던 유피테르신(천둥과 번개를 다스리고, 신들의 왕)으로 주피터로 알려졌고, 그리스의 제우스(Zeus)와 동일시되었다. 그 위대한 신을 버리고, 작은 정복지의 초라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했다고 말이다.

콘스탄틴 대제
콘스탄틴 대제

이런 공격을 받은 콘스탄틴 대제는 로마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져 다시는 로마를 방문하지 않았고, 로마는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Constantius)가 서방의 부제가 되자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디오클래티아누스 황제의 인질로, 청년 때까지 동로마의 수도 니코메디아 궁에서 자라야 했다.

대신 궁중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황제를 수행하여 이집트, 아시아 등의 원정에 참여했고,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아 고위 장교의 계급에도 올랐다. 그는 최고 권력자 지근의 자리에서 권력의 작동에 대해, 그리고 사두 정치의 모순이 무엇인지 예리하게 관찰할 수 있었고, 그런 경험은 후에 로마를 통일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기독교 말살 정책을 어떻게 구현했는지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진 퇴위하여 고향 크로아티아로 물러가고 새로운 권력자가 된 갈레리우스가 동방의 실권자가 되자 유능한 콘스탄틴을 극도로 경계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콘스탄틴은 병중이라는 핑계를 대고, 밤을 이용하여 동방에서 탈출했다.

추격자들을 따 돌리기 위해 역참의 말들을 죽이거나 힘줄을 끊어 추격하지 못하게 했고, 목숨을 위해 브리타니아 부황제로 있는 아버지에게로 도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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