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급변하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인공지능(AI)은 급속도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 온 미풍양속은 점점 사라지고 윤리와 도덕의 가치마저 흔들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2천 년 전 시대에 적용되던 종교의 가르침을 오늘의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타협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타협하지 않으면 완고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배척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성령도, 천국도, 신앙의 본질도 가볍게 여겨진다면 결국 신앙은 변질될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웃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새로 이사한 집 바로 옆에 사람이 살고 있어도 바쁘다는 이유로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대사회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상호 불신 속에서 이웃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 세계는 전쟁과 갈등의 여파 속에서 흔들리고 있으며, 경제 상황은 불안해지고 있다. 국가의 기본 세포라 할 수 있는 가정의 질서마저 약해지고 있다. 살인과 같은 무서운 사건들이 쉴 새 없이 보도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왜 사람들이 사소한 일조차 참지 못하고 분쟁을 일삼는지 묻게 된다.
그것은 사랑의 부재이자 이웃의 붕괴를 보여주는 현실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불법을 말하고 도덕적 기준을 말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이웃과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이제 창세기 31장을 중심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헤어질 때는 과감히 헤어질 줄 알아야 한다
본문에서 야곱은 라반과 계속 다투기보다 차라리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 야곱은 외삼촌의 집을 떠나게 된다. 이것은 야곱에게 큰 결단이었다.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우상을 가지고 떠난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사람은 어떤 이유로 만났든 헤어질 때가 되면 아쉬움과 섭섭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서로 다투고 싸우며 관계를 더 깊이 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때로는 헤어짐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야곱 역시 헤어짐의 아픔이 있더라도 계속 다투고 싸우는 것보다 떠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관계를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이 신앙적인 태도는 아니다. 때로는 더 큰 다툼을 피하기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하고, 서로를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결단해야 할 때도 있다. 헤어짐이 곧 미움은 아니다. 바르게 헤어지는 일 또한 관계를 지키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경계가 분명해야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증거의 돌기둥과 돌무더기를 쌓았다. 창세기 31장 44절부터 55절에 나타난 이 장면에서 야곱과 라반은 기둥을 세워 증거의 단을 삼았고, 그곳을 미스바라 불렀다. 이는 상호 약속의 의미를 지닌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의 표시이기도 했다.
훗날 이 경계는 이스라엘과 수리아 사이의 국경이 되었다. “좋은 담은 좋은 이웃을 만든다”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처럼, 경계는 단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른 경계는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게 하고, 좋은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평화와 화해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좋은 이웃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세계와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자연과 우주를 보전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고 인간의 기본 자유를 억압하며 자연을 파괴하는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화해와 용서, 연합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창조주의 뜻이라고 믿는다.
동족임에도 서로 등을 돌리고 총구를 겨누며 적대시하는 현실 또한 회개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갈라졌던 민족 가운데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고, 전쟁의 무기가 평화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소원한다.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이해할 때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주관과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고집도 있다. 그러나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양보할 때 이웃과의 관계는 이어질 수 있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사이에서도 서로 상대의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아량이 필요하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속한 교단과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 한계를 비교적 빨리 넘어서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 지렛대가 된 것은 공부였고, 기독교 신앙이 나를 이끌었으며, 민족의식이 그 뒤를 따랐다. 역사 공부를 통해 과거 사람들의 실패와 전진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면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여러 교계 인사들과 다양하게 만나 대화하며 관계의 지평을 넓혀가기도 했다. 특히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지역회장과 전국초교파원로회 사무총장으로 재임할 때,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한국 기독교가 지나치게 갈라져 있음을 실감했다. 더 나아가 남과 북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갈라져 있는 현실을 애석하게 생각했고, 협력과 통일로 나아가는 길을 염원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사회와 교계가 보수와 진보의 양 진영으로 나뉘게 된 결정적 계기 가운데 하나는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함석헌,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진영은 이에 반대했고, 다른 쪽은 지금의 보수 인사들을 중심으로 개헌에 찬성했다. 이렇게 갈라진 상황 속에서 여러모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으나, 분열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현재도 남과 북 사이에는 통일운동과 북한 나눔운동 등을 통해 그 간격이 조금씩 좁혀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 길은 여전히 멀게만 보인다. 그러나 이제 큰 안목에서 남과 북 사이에 대화의 물꼬가 트이고, 여와 야가 협력과 일치를 향해 나아간다면 머지않아 통일의 꿈도 현실로 다가오리라 확신한다. 영남과 호남, 가진 자와 소외계층이 함께 어깨동무하는 날을 꿈꾸어 본다.
어느 선배가 “한국 신학교의 약점은 자기 선생이 가르친 것밖에 모른다는 데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만 붙들면 다른 견해를 존중하기 어렵다. 한쪽만 보고 다른 한쪽의 말과 글은 아예 읽지도 보지도 않는다면, 어찌 통일을 배울 수 있겠는가.
좋은 사람들이 모여 좋은 일을 해도 반대는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은퇴 후 사회활동과 대림 주민자치회 봉사를 하면서 때로는 좋지 않은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동기와 방향을 다시 점검했고, 반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빌립보서 2장 1절부터 4절은 “그리스도 안에…… 마음을 같이하여……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한다. 이는 화해와 용서의 가르침으로 이해된다.
여기에 장순하의 시 한 편을 올려본다.
국사봉 밑에 살면
국사봉을 닮아가고
북악산 기슭에 살면
북악산을 닮아가기 마련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서 닮아가기 마련.
북악과 인왕이 어떻게 이웃하게 되었을까?
서로 돌아앉아 남남처럼 지내던 그들이
밤이 이슥하여도
도란도란 속삭이며 잠이 들어 밤을 새운다.
이 시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허물없이 대화할 때 둘 사이가 이웃이 될 수 있음을 표현한 시로 이해된다. 대화가 부재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마음에 울림을 주는 시로 다가온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 참된 이웃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의 교훈을 받게 된다.
본문에서 야곱은 20년 동안 근면과 성실로 봉사했으나, 라반은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고난과 노고를 돌아보시고 갚아주시며 축복해 주셨다. 창세기 31장 38절부터 41절에 나타난 말씀처럼, 사람은 우리의 수고를 몰라줄 수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속임을 당하고 학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예측하며 산다. 사람들은 돈이면 모든 행복이 보장될 것처럼 판단한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은행에 저축해 놓은 것이 없으면 찾아 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동안 주위의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덕을 세우며,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함께 나누면 이웃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이상적인 관계로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갖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아무도 그를 위로해 주려 하지 않을 수 있다. 부모가 노후에 자식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평생 동안 자식을 위해 사랑을 저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은 저축해 놓은 것이 없으면서 무언가를 요구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어쩔 수 없이 갈등과 질시가 생기기 마련이다. 인간사는 비정하리만큼 정확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재 여와 야가 서로 다투고 싸우기만 하는 것처럼 보여 뜻있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러한 모습에는 사랑의 향기는 없고 악취만 풍겨오는 듯하다.
때로는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당신의 사랑 소리에 눈시울이 젖어들고, 때로는 태양빛처럼 우뚝 선 산 같은 당신의 사랑에 덥석 안기기도 한다. 꽃바람이 불지 않아도 꽃은 피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당신의 사랑의 꽃가루로 내 혼이 생수처럼 맑아진다. 당신의 사랑이 내게 부어져 충만해지고, 그 사랑이 살아 흘러 내 마음에 씨로 떨어져 싹이 트고 잎이 무성하기를 기원해 본다.
잠언 17장 22절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를 바란다. 그런데 왜 우리는 행복하고 즐겁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기쁨을 삶의 결과물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다. 좋은 일이 있어서 내가 기쁘고 즐겁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러나 기쁨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다. 기쁨은 삶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마중물이다. 출근길 차 안에서 크게 웃어보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인사하기,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기, 소외된 이들을 찾아 위로하기 같은 일들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실천이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한다.
그동안 멀리 있는 이웃과 형제들에게 전화 한 통이라도 해야겠다. 그러면 이웃과의 관계가 다시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소외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가정의 달이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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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