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아고 실바
티아고 실바 목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티아고 실바의 기고글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길고도 위험한 여정이다’(The Christian life is a long and dangerous journey)르 1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티아고 실바는 브라질의 맥켄지 장로교 대학교(Mackenzie Presbyterian University),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 퓨리턴 개혁 신학교(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실바 박사는 루이지애나주 레이크찰스에 위치한 베델 장로교회(PCA)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동시에 C. S. 루이스 연구소 레이크찰스 지부의 시티 디렉터 그리고 저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우주에는 중립 지대가 없다. 모든 평방인치, 모든 찰나의 순간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며 동시에 사탄이 반대 주장한다.” — C. S. 루이스, 『기독교적 성찰』

1942년, 유럽 전역에 폭탄이 쏟아지고 도덕적 질서가 붕괴된 침묵이 깔린 가운데 C. S. 루이스는 다소 기묘한 작은 책 한 권을 내놓았다. 그것은 한 노련한 악마가 젊은 수습 악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허구적 작품이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처음부터 성공이 보장된 책처럼 보이지 않았다. 영감을 주는 책도 아니었고, 전통적 의미의 교리서도 아니었으며, 노골적인 영적 위로를 제공하지도 않았다. 대신 이 책이 제공한 것은 ‘적진의 내부’를 엿보게 하는 창이었다. 그 어두운 거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 루이스는 많은 이들이 잊고 있던 사실을 드러냈다. 곧,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이며, 그 전장은 영혼이라는 사실이다.

루이스의 통찰은 거창한 계시에 있지 않고, 일상의 영적 형성에 있다. 원수의 목표는 환자를 극적인 죄로 단번에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에 싫증을 느끼게 하고, 자기 겸손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며, 정치에 정신을 빼앗기게 하고, 피상적인 로맨스에 매혹되게 하며, 고난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기도에는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크루테이프는 믿음을 한 번의 타격으로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잡동사니로 믿음을 질식시키려 한다. 각각의 편지는 영적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교훈이다. 그것은 화려한 승리나 패배에서가 아니라, 생각과 습관, 마음의 영역에서 매일 내려지는 수천 번의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점이 바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의미를 갖는 이유다. 참된 제자도, 곧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평생의 과정은 일상 속에서 빚어지고 시험받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은 전장의 끝자락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부엌에서, 교실에서, 사무실에서, 예배당 의자 위에서 펼쳐진다. 루이스는 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기발함에 그치지 않고 목회적인 책을 썼다. 아이러니와 풍자 아래에는 영혼을 향한 치열한 사랑과 교회를 향한 깊은 염려가 흐르고 있다. 루이스가 보여주듯 그리스도인의 삶은 추상적 개념이나 주말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적의 영토에서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길고 위험한 여정이며,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거나 그분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이해하기: 배경과 내용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출간된 1942년,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 있었다. 국민들은 대공습을 견뎌냈고, 침공의 위협 속에서 살았으며, 광범위한 고통과 두려움, 상실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 무렵 루이스는 BBC 라디오 강연을 통해 전국적 청중을 확보하고 있었고, 이 강연들은 훗날 『순전한 기독교』로 묶이게 된다. 그의 목소리는 세속화와 회의주의, 전통적 기독교의 영향력 약화로 점점 물들어가던 문화 속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재치와 신학적 통찰을 통해 이러한 변화에 맞섰다. 노련한 악마의 허구적 서신이라는 형식을 통해, 일상이라는 가면 아래서 번성하는 분심, 교만, 영적 무기력을 폭로했다. 루이스의 풍자·신학·상상적 변증의 결합은 전쟁으로 지친 세대에게 문화 비평이자 영적 조언이 되었다.

이 책은 선임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새내기 유혹자 웜우드에게 보내는 31통의 가상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웜우드는 ‘환자’라고만 불리는 새 신자를 맡는다. 스크루테이프의 냉소적이고 거만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형성을 무너뜨리려는 영적 세력의 전술을 깊이 있고 때로는 뼈아프게 정확한 방식으로 보게 된다.

이 책의 힘은 ‘전도된 신학’에 있다. 스크루테이프는 하나님을 ‘원수’라 부르고, 겸손·정절·사랑 같은 기독교적 덕목을 혐오스럽게 묘사한다. 이 역전된 관점은 독자로 하여금 반대편에서 신학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이상주의가 아니라 영적 저항의 렌즈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유혹의 미묘함을 악행뿐 아니라 왜곡된 욕망, 습관, 사랑 속에서 작동하는 유혹을 인식하게 된다.

스크루테이프는 웜우드에게 극적인 죄에 의존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대신 그는 느리고 작은 침식을 권한다. 설교를 적용하기보다 비평하게 만들고, 정직한 고백 대신 막연한 감정으로 기도하게 하며, 교회 지체들의 결점을 집착하게 만들고, 안락과 안전을 우상화하게 하며, 복음을 잊은 채 정치적 헌신을 영적으로 포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악마학 입문서가 아니라, 타락한 세계에서 제자도의 연약한 여정을 비추는 거울이다.

신학적으로 이 책은 성화에 대한 루이스의 이해로 가득 차 있다. 조직신학을 쓰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의 비전은 성경적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과 공동체, 회개와 순종을 통해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스크루테이프는 환자가 아무 감정 없이도 영적으로 성장할 때, 조용히 유혹을 거부할 때, 의심 속에서도 진실하게 기도할 때 격분한다. 루이스에게 이것이 바로 참된 제자도의 표지다.

더욱이 이 책은 화려한 영적 승리 장면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난다. 스크루테이프가 “원수의 영토”라고 부르는 순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환자는 평안을 얻는다. 그는 자신의 강함이 아니라 붙들림으로 영광에 들어간다. 비틀거리지만 참되게 견디며, 결국 악마들은 그를 놓친다.

이 점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오늘날 제자도 논의에 특별히 설득력 있게 만든다. 이 책은 환상이 아니다. 허구의 외피를 쓴 현실이다. 우리는 종종 외면하는 사실을 직시하게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외적 압력뿐 아니라 내적 표류와 싸우는 전쟁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은혜로 빚어진 의도적 제자도만이 참된 저항이라는 사실이다.

형성 과정에 있는 제자의 초상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중심 인물인 ‘환자’는 영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순교자도, 신비가도, 환상가도 아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이름이 새겨질 성인도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지극히 평범하다. 바로 그 점이 그를 강력하게 만든다. 그는 곧 우리이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환자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다. 특별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수많은 신자들의 집합체, ‘보통 사람’을 제시한다. 그는 이야기 초반에 회심하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기도한다(비일관적이지만).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는 자주 혼란스럽다. 정욕, 교만, 두려움, 게으름, 영적 건조함과 싸운다. 그의 애정은 혼합되어 있고, 동기는 불분명하며, 신념은 압박받는다. 문화와 우정, 지적 유행, 개인적 고통의 영향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무언가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제자훈련을 받고 있다 — 프로그램이나 제도적 의미가 아니라, 형성적 영적 의미에서. 그의 삶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거나 세상에 의해 일그러지며 형성되고 있다.

스크루테이프의 지침은 음흉한 ‘반(反)제자도 커리큘럼’이다. 목표는 단번에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안일함을 조장하고, 감정을 악용하며, 수동성을 키운다. “지옥으로 가는 가장 안전한 길은 점진적인 길, 부드러운 경사로, 갑작스러운 전환도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는 길이다”(12번째 편지). 그래서 그는 기도를 자기중심적으로 왜곡하고, 겸손을 ‘겸손을 자랑하는 교만’으로 부패시키며, 교회를 짜증의 원천으로 바꾼다 타인의 위선을 증폭시키고, 사회적 차이를 과장하며, 반복 속에서 영적 활력을 무디게 한다.

그럼에도 스크루테이프를 가장 좌절시키는 것은 환자가 극적으로가 아니라 진실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느낌이 없을 때에도 순종하고, 자기변호 없이 회개하며, 영적 위로가 없어도 하나님께 나아간다. 바로 이 조용한 순종의 순간들에서 그의 장악력은 약해진다. 그 환자는 영광이 아니라 ‘버팀’ 속에서 성숙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인내는 세상 기준으로 인상적이지 않다. 극적이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다. 연약하다. 그러나 참되다. 그는 계속 기도하고, 교회에 나가며, 고백하고, 걷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음이 찾아올 때,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승리다. 그는 위대함을 성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가 그를 붙들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임재로 맞이받는다. 그는 영적 셀러브리티가 아니라 제자로 들어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점이 오늘날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더욱 강력하게 만든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윤색된 영웅담으로 그리지 않는다. 회색의 투쟁, 조용한 믿음으로 그린다. 의심과 유혹, 피로와 죄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주장한다. 제자도는 강한 자의 특권이 아니라 은혜에 매달리는 약한 자의 길임을 상기시킨다. 불안한 이들, 지친 이들,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길 — 곧 우리를 위한 길이다.

환자의 이야기는 영적 탁월함이 아니라 신실함의 이야기다. 그리고 결국 성화란 바로 그것이다. 느리고, 대가를 요구하며,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과정. 이 이야기는 제자도가 특별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주여,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하는 모든 이에게 가능하다는 확신을 준다.

제자도와 영적 전쟁

왜 제자도와 영적 전쟁을 함께 묶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중립적인 자기계발의 여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충성의 전쟁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쟁탈 중인 공간으로 들어서는 일이다. 은혜에 의해 소유되고, 원수에게 추적당하는 삶이다. 우리는 매일 예수와 함께 시련과 유혹, 고난과 작은 승리들을 지나며 기도하는 법, 사랑하는 법, 저항하는 법, 견디는 법을 배운다. 루이스는 악마들의 전도된 논리를 통해 원수가 어떻게 일하는지를 보여주며, 은혜가 어떻게 승리하는지를 가르친다.

루이스는 전쟁이 항상 극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종종 그것은 지루하다. 지옥의 무기는 언제나 폭력과 혼란이 아니라, 권태와 분심, 원망과 교만, 영적 무기력이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신자들을 압도하기보다 서서히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지옥이 전쟁을 수행함을 보여준다 — 작은 타협 하나씩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환자는 추락이 아니라 표류로 무너진다. 필자는 이 통찰이 현대 시대의 제자도를 위한 루이스의 위대함이라고 믿는다.

악을 가볍게 여기고, 초자연을 부정하며, 기독교를 치료적 도구로 축소하는 시대에 루이스의 비전은 강력한 교정이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쟁탈된 땅임을 상기시킨다. 원수는 불신보다 분심을, 대결보다 안일함을, 용기보다 냉소를 선호한다. 그러나 복음은 더 큰 진리를 선포한다. 그리스도는 승리하셨다. 그의 죽음은 권세들을 무장해제했고, 부활은 그들의 패배를 확증했으며, 그의 성령은 교회가 끝까지 견디도록 무장시킨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 현실 속에서 군사로 사는 것이다. 유혹을 거부하고, 사랑의 질서를 재편하며, 끝까지 교회와 함께 견디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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