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다정하고 사랑했던 딸이 수녀원에서 서른세 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이미 20대에 치아를 거의 다 잃어 쇠약해진 딸은 이질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떠났다. 아빠의 마음이 어땠을까? 비참했을 게다. 자신만 살아남아 숨을 쉬고 음식을 먹고 햇빛을 받는 게 싫었을 테다. 또 죄책감도 있었을 게다, 딸을 수녀원으로 보낸 것은 바로 자신이니까. 그 아빠가 다름 아닌 ‘갈릴레오 갈릴레이’이다.

인도의 한 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앞만 보고 집으로 달려갔다. 혹시 친구들이 말을 걸거나 못살게 굴까봐 두려웠다고 한다. 아이는 매일 몸이 뻣뻣하게 굳을 정도로 긴장하며 살았다. 그 아이는 수줍고 겁 많은 성격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커서도 사람 앞에 서면 어지러웠다. 하지만 인생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그 내성적인 아이를 데려간다. 수억 명을 이끌고 감동시키는 지도자가 된 ‘마하트마 간디’의 이야기이다.

미국에는 자신이 가장 비참한 존재라고 확신하는 청년이 있었다. 죽음의 충동이 마음 깊이 도사렸다. 견딜 수 없어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금방 호전될 수는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청년이 자살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청년의 인생에는 비극이 많았다. 가난해서 학교를 못 다녔으며,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사랑하는 약혼녀도 병으로 잃었다. 결혼해 낳은 아이 중에서 둘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숨졌다.

하지만 그는 정신을 놓거나 패배하지 않았다. 끝내 우울을 훌쩍 뛰어넘어 강건한 정신의 정치인이 된다. 그는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갈릴레오의 딸이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아버지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세상 앞에서 당당하던 천재 과학자도 사랑하는 자녀를 잃는 슬픔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인간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딸의 삶을 빼앗은 것은 아닌지 자책하며 밤마다 스스로를 자책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통함 속에서도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 우주를 읽어낼 수 있을지라도, 삶과 죽음은 여전히 우리 손을 벗어난다는 사실을. 성경은 “여호와의 것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시 24:1)이라고 말한다. 갈릴레오는 그 절대적 주권 앞에서, 한 인간으로서 겸손히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싫어했으나 그리스도는 존경했던 간디의 어린 시절은 영웅적이지 않았다. 친구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달렸던 내성적인 소년, 사람들 앞에만 서면 머리가 하얘지던 연약한 아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세상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7)라는 말씀처럼, 간디는 오히려 그 연약함 때문에 사람들의 고통을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비폭력이라는 가장 강한 힘을 세상에 남겼다.

그는 힘이 없어서 그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연약함을 통해 더 큰 힘을 발견한 것이다.

링컨의 삶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우울증과 실패,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가난. 그의 인생에는 밝은 날보다 어두운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는 그 그늘 속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며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롬 5:3–4)는 진리를 삶으로 증명했다.

링컨의 위대함은 정치적 성공보다, 고통을 통해 더 크고 넓은 마음으로 변모한 그의 인성에 있었다. 그는 인간의 연약함이 곧 실패의 이유가 아니라, 더 깊은 성숙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세 인물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지만, ‘한 방향’을 가리킨다. 인생의 가장 깊은 슬픔과 상처가 어떤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시 일으켜 세우며 더 깊은 존재로 빚어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허용하시지만, 그것을 절망의 상태로 버려두진 않으신다.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하여 우리가 이전보다 더 넓은 마음, 더 성숙한 시선, 더 깊은 사랑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도록 하신다. 성경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고 말씀한다. 고난 자체가 유익하다는 말이 아니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이 그 이전보다 더 깊어지고 더 온유해지고 더 지혜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갈릴레오는 ‘상실의 아픔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간디는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링컨은 ‘실패 속에서 인내’를 배웠다. 그리고 그 배움은 그들의 삶을 단순한 한 인간의 역사를 넘어 인류에게 빛을 비추는 위대한 유산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고통이 우리의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실패에서 새로운 길을, 눈물에서 새로운 소망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들고 가는 슬픔이 무엇이든, 그 앞에서 절망하지 말자. 고통의 무게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더 깊이 빚으시며, 그 손끝에서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온전한 사람으로 새롭게 빚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로 사용하신다. 더 깊은 사랑과 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은혜의 통로로 바꾸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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