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높은 산이었다. 또한 이승만은 큰 바다였다. 그리고 이승만은 우리에게 큰 바위의 얼굴이었고, 한국의 모세였다. 또한 그의 삶의 발자취는 우리의 근대사가 되었고,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킨 어른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민족이 가야 할 길을 걸었던 외로운 선지자요, 우리의 목자였다.
그는 어둡고 몽매한 사람들을 일깨웠고, 자유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그의 머나먼 투쟁은 녹록지 않았다. 그럴지라도 그의 간절한 기도와 지혜로 안팎으로 조여오는 고통을 감내하고 싸워서 기어이 자유대한민국을 만든 국부 곧 우리나라의 어버이가 되었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그가 얼마나 나라를 위해 홀로 고뇌하였는지 오늘의 우리 한국인들만 잘 모른다. 만에 하나 이승만의 예지와 고뇌 그리고 그의 결단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유대한민국은 없었고, 공산주의 나라가 되어 여전히 세계 최빈국이 되었을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자, ‘New York Time’지의 존슨 기자가 쓴 헤드라인 뉴스에는, “공화국의 탄생,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의해 대한민국 곧 Republic of Korea Tae Han Min Kook이 탄생 되었다”고 썼다. 그 후 UN의 승인을 받았다. 너무나 명명백백히 나라를 세운 것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한 셈이다. 이승만이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 받고 기도로 시작한 나라는 지구상에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웃긴 것은,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 설립 연도도 없고, 이승만의 이름도 없다는 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 중에 자기 나라를 세운 분과 나라를 세운 날짜가 없는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세계의 6위의 나라 대한민국! 그것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좌경화된 역사가들과 언론인들과 좌파 정치가들은 이승만 죽이기를 얼마나 해왔는가! 우리는 이 지구상에 자기 나라를 세운 국부를 욕하고, 기념관 하나 못 세운 참으로 부끄러운 나라가 되었다. 이승만 기념관 건립위원회가 결성되어 순조롭게 모금 운동을 하고는 있지만, 부지 결정을 놓고 서울시장님이 미루고 있단다. 그는 누구의 눈치를 보기에 기념관 장소를 그토록 미루고 있을까? 하기는 그가 무슨 사적인 꿈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나는 40년 전부터 <이화장>에 가서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예배를 인도했었다. 그런데 정작 이 나라는, 이승만의 위대한 독립운동과 흑암에 처했던 우리 민족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세운 국부를 <독재자>라는 프레임을 씌워 80년간 짓밟아 놓고 있다. 나는 얼마 전 <카이퍼와 이승만>이라는 조그마한 책을 썼다. 카이퍼 박사와 이승만은 민족의 지도자로 사상이 엇비슷하다. 두 분 모두 위대한 하나님의 중심의 신앙을 갖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의 지도자였다. 그러니 이승만은 <한국의 카이퍼>라 할 수 있다.
카이퍼(A. Kuyper)가 네덜란드 수상직에서 내려올 때,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된다. 이승만의 가슴 속에는 목사가 되어 우리 민족을 구원할 마음으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과목 신청을 해서 공부했다. 라틴어, 헬라어는 물론 박형룡 박사와 한경직 박사의 스승이었던 챨스 어드만에게 ‘바울신학(Pauline Theology)’을 공부하고 그린(Greene) 교수로부터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을 공부했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의 사상은, 바로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의 <칼빈주의 사상>이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당 울타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친다’는 <영역주권 사상>이었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에서 Ph.D를 받기 전, 신학교에서 파트 타임으로 몇 과목을 더 이수한 후, 그가 신학을 계속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그런데 몇 년 전 프린스턴신학교 총장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한 자료 하나를 받았다. 그것은 1953년 11월 3일 자, 이승만 대통령이 프린스턴신학교 졸업생 동창회(Alumni)에 가입 원서를 냈다는 자료였다. 당시 경무대에서 타자로 작성된 문건이었다. 아마도 이승만은 1910년에 프린스턴대학에서 Ph. D를 받고, 잠시 한국에 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쳤던 것 같다. 그렇게 이승만의 가슴 속에는 자유대한민국을 세우되,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나라를 이끌겠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세계 모든 공항에는 나라를 세운 국부의 이름을 붙이고, 국부의 이름으로 돈을 발행하고, 국부의 이름으로 대학을 만들고, 국부의 거리를 만든다. 나는 지난주 다시 안동댐을 방문하는 중, 봉정사 인근에 자리한 ‘죽헌고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런데 봉정사를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갔다고 해서, 그 도로명을 ‘퀸 엘리자베스 로드’라고 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자유대한민국을 세운 엄연한 ‘국부’다. 그러나 건국 대통령 기념관 세우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자기의 부모도 모르고, 태어난 생일도 모르는 사생아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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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