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들어가는 말
구속론에 대한 저술은 많으나 속죄론에 대한 것은 그렇지 못하다. 대한기독교서회는 1968년, G. 아울렌의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전경연 역, 한글 제목은《속죄론 연구》)를 출판하였다. 이후 1998년까지 7쇄를 거듭하였는데, 내가 이 책을 구독한 것은 7쇄 본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다시 꺼내 읽으면서 이 글을 쓴다. 구스타프 아울렌(Gustaf Aulen, 1879-1977)은 스웨덴 교회의 주교 및 루터교의 신학자였다. 이 책의 요지를 약술한 후, 필자의 의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하 각 제목은 이 책 그대로이다.
Ⅱ. 아울렌의 속죄론 연구
1. 저자의 문제 제기
초대 교회에는 속죄론 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교부들은 주로 기독론과 삼위일체 교리에 관심을 두었다. 속죄론을 교리(敎理)로 언급한 이는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이다. 그는 구원을 육체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종전의 견해 대신에 죄책에서의 구원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 대상이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이 화해를 받으셨다고 하였다. 그의 이 ‘객관적 견해’는 이후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 등의 ‘주관적 견해’와 병존해 왔다. 속죄 행위를 하나님의 투쟁과 승리로 본 고전적 견해는 이렇다. 승리자 그리스도가 세상의 악한 세력, 곧 인류를 속박하고 고난을 받게 하는 폭군과 싸워 정복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해하셨다. 이는 구속(救贖)에 대한 연극이며, 통 털어서 속죄(贖罪)라는 말이 되는, 이원론적이고 극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이것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라기보다, 이미 신약성경 안에 들어 있는 지배적인 내용이다. 이러한 고전적 속죄론은 계몽주의 출현과 함께 도전을 받았다. 그것은 고전적 속죄론을 라틴 견해의 객관적 속죄론과 혼동함으로써였다. 이러한 혼동은 사용되는 술어(‘희생’, ‘만족’, ‘그리스도의 공로’ 등) 때문이었다. 이후 보수주의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이 고전적 속죄론에 비판적이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전자는 이론의 미흡함 때문에, 후자는 교부들의 가르침을 신화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주된 신학 사상은 이상주의적 철학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철저히 일원론적이고 발전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이원론을 악마론적 신화로 규정하였다. 사실 19세기 신학자들의 이러한 비평은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와 교리사적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속죄는 하나님의 본성에 관련된 기독교의 본질이다. 속죄론에 대한 정통은 교부들로부터 안셀무스나 중세 스콜라 신학이 아니라, 루터로 계승되었다.
2. 이레네우스
아울렌의 관찰은 이렇다. 교부들 중 처음으로 속죄론과 구속론을 명확하고도 포괄적으로 서술한 사람은 이레네우스(Irenaeus, 130?-202?)이다. 이레니우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카르포스의 제자이다. 그의 관점은 이렇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속죄와 화해가 없이는 제거되지 않는 적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을 고의로 배반한 자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죄를 멸하고 죽음을 극복하고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고, 악의 세력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세상과 화해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승리이며, 구속은 용서라기보다 생명을 주는 것, 죄를 극복한다기보다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단을 다루시는데 있어서도 강제나 폭력이 아니라, 정의의 질서 있는 방법으로 행하신다.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으심 및 부활을 통해 완성되고, 성령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의 합일과 사귐’을 이루신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과 합일하지 않는다면 그는 영생에의 참예자가 될 수 없다.
3. 동서의 교부들
아울렌의 관찰은 이렇다. 이레네우스의 속죄론은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Iohannes of Damascus, 676-749)에 이르기까지 동방은 물론 서방의 교부들에게도 지배적인 견해였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와 대 그레고리우스(Gregorius Magnus, 540-604)도 고전적 속죄론을 채택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3-373)는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죽음에 굴복하게 되었기 때문에 말씀이 오셔서 이 부패의 세력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야 하였다고 보았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ios Nazianzenos, 329-390)는 성육신의 목적을 “하나님이 그 폭군을 이기므로 우리를 자유케 하고, 우리가 그 아들을 통하여 자기와 화해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는 “저 폭군이 사람 위에 지배권을 행사한 후에 폭력으로 그것을 내어놓도록 강요당한다면 그가 불평할 조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동정하고 사랑하며 정복한 자를 승리자라고 선포하기 원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라고 하였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335-395)는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오신 것에 대하여 “높은 자가 그 높음을 잃지 않고 낮은 자에게 허리를 굽히며, 신성이 인간 본성과 합일하고, 신성을 멈추는 일 없이 인간이 된다. … 이것이 어두움을 쫓는 빛의 본성이며,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의 성품이다”라고 하였다. 구속이 악마와의 거래라는 사상은 초대교회에서 회자된 이론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여러 교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또한 전적으로 법적 배경의 속죄론으로 해석하는 라틴의 견해와는 달리, 교부들의 속죄론은 ‘공정한 연기(演技)’라는 성격을 지닌다. 결론적으로 교부들의 속죄론은, 인간의 구속을 위해 내려오신 하나님이 폭군인 사단을 이기시고 화해를 이루심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적대 관계가 제거되고 새로운 관계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4. 신약성서
아울렌의 관찰은 이렇다.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정통신학의 ‘만족설’을 뒷받침하는 것은 확실하다. 바울서신에 들어 있는 말씀들(롬 3:24; 4:4,25; 5:7,18; 6:11; 8:35; 10:4; 고전 5:7; 10:16; 11:25;15:24,26; 고후 5:18; 갈 3:4,10,13; 엡 1:7; 빌 2:10; 딤전 2:6; 딤후 1:10; 딛 2:14 등), 그리고 막 10:45; 요 12:23; 16:8ff; 행 20:28; 벧전 1:18; 히 2:14; 9:12; 요일 3:8; 계 1:18; 5:5 등의 가르침도 교부들의 그것과 일치한다. 속죄론에 대한 신약의 관점은 구약과 대비되는데, 구약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율법의 의무라면, 신약의 그것은 사랑과 자비와 은혜이다.
5. 중세기
아울렌의 관찰은 이렇다.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155-230)는 라틴의 견해를 위한 건축 자재를 준비하였고, 치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 210-258)는 그 자료로 속죄론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고 보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하기를 “속죄의 행위를 실천하지 않고 죄의 용서를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주님은 이 값을 치루고서야 용서를 주도록 작정하신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말에서 라틴의 속죄론은 ‘만족과 공로’라는 개념을 이끌어내었다. 여기서 공로는 단식, 자발적 독신생활, 순교 등을 함축한다. 치프리아누스는 이 원칙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획득된 여분의 공로’에 적용하였는데, 그의 이 업적을 라틴의 속죄론에서 ‘만족’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라틴 견해의 ‘공로설’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가 성장해온 모체는 고해성사 제도이며, 라틴 견해는 여기에 법적 의미까지 부여하였다. 라틴 견해의 속죄론은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에게서 잘 나타난다. 그의 주장을 조금 더 부연하면, 속죄에는 죄를 소멸시키기 위한 징벌이 들어 있고, 인성은 그의 신성에게 드린 제물이다. 이에 그를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이는 그의 사상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 것이다. 안셀무스의 속죄론은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도 수용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직 은총’(sola gratia)이라는 종교개혁의 구호와는 배치되는 면이 있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서, 만족설을 비롯한 안셀무스의 속죄론은 스콜라 신학의 영향을 받은 ‘명목론’(Nominalism)으로 거의 대체되었다. 명목론의 요지는, 하나님께는 인간으로서 고난 받은 그리스도의 업적, 유한한 공로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는 그것을 인정하고 즐겨하시는데 가치가 있다. 이런 이론은 라틴 견해의 해체를 의미한다고 아울렌은 지적한다. 왜냐하면 속죄는 철저히 하나님 자신의 업적이라는 교부들의 가르침은 합당하기 때문이다.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는 중세를 거치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찬송과 연극, 설교 등을 통해 이어져 왔다.
6. 루터
아울렌의 관찰은 이렇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신학 사상에는 안셀무스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루터의 속죄론은 명백히 고전적 견해에 속한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벌인 투쟁과 승리에 대해 강렬한 표현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는 교리문답, 저술, 신학 체계 등을 통해 이를 명료히 하였다. 그가 소교리문답에서 “그는 잃어지고 멸망에 작정된 사람인 나를 모든 죄와 죽음과 사단의 세력에서 건지시고 값으로 사시고 또 자기의 소유로 하셨다”라고 한 말이 오랫동안 속죄론의 라틴 견해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교부들의 사상과 동일한 것이다. 그는 죄, 죽음, 마귀, 율법, 진노의 표상으로 그리스도, 하나님의 승리를 강화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리스도인의 희생적 헌신을 강조한다. 라틴 속죄론의 표상인 ‘공로’와 ‘만족’을 루터는 갱신하였는데, 그리스도의 공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한 것이고, 만족 행위(satisfaction)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공로와 만족은 그리스도의 투쟁과 승리에 관련지어 사용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속죄론은 법과 정의, 고해(告解)의 도덕주의적 사상이 들어 있는 라틴형 속죄론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사용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는 라틴 교리가 사용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응한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교부들의 고전적 속죄론을 더 강력하게 구현하였다. 그의 사상은 그의 《노예 의지론De serbo arbitrio》에 잘 나타나 있다.
7. 종교개혁 이후
아울렌의 관찰은 이렇다. 종교개혁 이후 루터의 가르침은 계승되지 않고 라틴형 견해로 되돌아갔다.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 운동을 벌였던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뿐 아니라,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 등도 루터의 속죄론 및 의인 교리(義認 敎理)와는 결을 달리하였다. 개신교의 정통주의적 속죄론은 안셀무스의 교리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그것은 만족 행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그분의 생애를 통한 율법의 완성, 곧 능동적 순종(oboedientia activa)으로 이루어진 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라틴 교리가 이루어 놓은 것을 더욱 충실히 한 것으로, 이런 면에서 안셀무스보다 라틴의 것이 더 개신교 교리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도 하겠다. 종교개혁 이후 ‘주관적 견해’가 대두하였다. 이는 17세기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의 영향으로 속죄의 법적 이해가 인도주의적 사상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죄에 대하여는 ‘불완전한 상태’가 고려되었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불변하는 호의와 자비’가 ‘사랑’보다 우선하게 되었다. 19세기 들어서서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는 속죄가 구원에 선행한다는 정통적 견해를, 구원 이후에 속죄의 화해가 이루어진다고 그 순서를 뒤바꾸어 놓았다. 이는 인도주의적이고 주관적인 견해로서, 릿츨이나 라슈달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8. 세 유형
아울렌은 지금까지 그가 살펴본 속죄론에 대하여 고전형, 라틴형, 주관적형의 세 유형으로 정리하였다. 각각의 특징은 앞에 서술한 바와 같다. 아울렌은 고전적 속죄론에 대하여는 견해(見解, idea)라는 말을 붙이고, 나머지 둘에 대하여는 교리(敎理, doctrine)의 권위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의 주관적 견해이다.
Ⅲ. 나가는 말
아쉬운 점이 많은 주관적형 속죄론을 논외로 하면, 교부들의 견해인 고전형이든, 가톨릭교회의 라틴형이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견해이든 그 중심에는 성경이 자리하고 있다. 속죄론은 성경에 들어 있는 관련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을 정립한 것에 대해 공교회가 해석의 표준으로 받아들일 때 교리가 된다. 교부시대는 아직 교리 정립이 안 되었을 때이므로, 그것을 견해 혹은 교리로 선택하여 자리매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속죄(贖罪, Atonement)와 구속(救贖, Redemption)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리고 이 둘의 주체는 그리스도시다. 우리는 속죄 문제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틀 안에서 다루어야 한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그 나라의 네 가지 구성 요소는 하나님(왕), 하나님의 말씀(법), 땅, 그분의 자녀들(백성)이다. 그 나라는 그분의 나라이므로 그 백성 또한 그분의 종(種, species)에 속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첫 사람(창 1:26),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 생명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1:12)는 그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이다. 그 백성은 그분을 닮아 거룩해야 하고(레 11:45), 그러기 위해서는 첫 사람 이래로 원죄를 지닌 채 태어난 인간은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죄의 완전한 해결은 죽음이다(롬 6:23). 하지만 당사자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막 8:36).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제2위격의 하나님)로 오시어(요 1:14) 스스로 인간의 죄에 대하여 단번에 드리신바 된 것(히 9:28)은 인간이 지닌 이 죄 문제를 단번에 해결키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그리스도, 즉 성자의 위격)께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신 속죄와 대속이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속이다. 이제 사람은 대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속죄와 대속과 구속의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과 사단의 투쟁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 방면이다. 하나님의 승리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하는 사단의 세력을 무기를 사용하는 전투를 통하여 이루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분의 경륜 안에서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신 후,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리우심으로써(행 1:9)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서 승리케 하신 그 자체가 그분의 승리이다. 그러므로 속죄, 대속,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만족’이나 ‘공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한 방편이지, 그 자체가 전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와 대속과 구속(구원)의 은혜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부여되는(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새 생명을 받아 거룩하게(성화) 되어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유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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