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1970년대 한국 산업화 시대에서는 한국 경제 발전과 더불어 또 하나의 발전을 이룬 분야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 성장이었다. 산업화로 도시 근교에 공장이 세워지게 되어 그로 인한 인구 유입으로 교회도 다량 설립되어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그 이후, 한국에서의 기독교 교회성장은 세계 기독교계, 종교계, 사회학계의 이목을 받을 정도로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교회가 성장하니 교역자가 필요하여 교역자를 배출할 신학교도 세워지게 되었다. 그때, 교회성장 시대에는 주로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많이 세워져 부흥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 신학교와 연관하여 말하자면, 초기 한국에서 교회가 한창 세워져 가고 있을 때 신학생들 일부는 일본으로 가기도 했으나, 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유학가기 어려었던 시절이라 몇 명 안되었지만, 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미국 신학교, 즉 교단을 배경으로 유학을 갔다. 장로교 학생들은 프린스톤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로, 감리교 학생들은 드루대학교 (Drew University), 좀 진보적 성향의 학생들은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로 유학을 간 것이다.

1940-50년대 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들은 당시 미국 내에서도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를 제외하곤 미국 신학자가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주로 독일 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하게 되었다. 유학은 미국으로 갔지만, 신학은 독일신학을 공부하게 된 셈이다. 한국 신학생들은 그렇게 유럽 신학자들의 신학사상(사조)을 만나게 된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하르낙, 실존주의를 중심으로 한 루돌프 불트만,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판넨버그 등이다. 미국의 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유럽신학자들의 사상이 중심을 이룬 것이다.

이들을 통한 신학으로 말미암아, 1960년대 즈음, 그 다음 세대 학생들은 그때부터는 유럽에로 신학의 관심을 돌렸다. 마침, 자유주의 신학에 염증을 느낀 칼 바르트(Karl Barth)가 복음주의 신학으로 신정통주의(Neo-Orthodox Theology)를 들고 나왔고,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 바탕을 둔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실존주의 신학, 동시에 철학신학 색채를 띤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등장, 또 조금 후이기는 하지만,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이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럽신학이 세계신학을 주도하는 형태가 되었는데, 그 때까지도 미국에서 신학을 한다 해도 내용은 사실 유럽신학을 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신학은 그런 과정을 통해 유학 초창기나 그 다음 세대 유학파 모두 유럽 신학을 답습하는 신학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정치 및 철학의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 나아가 국가적으로는 주권이 강조되게 되어 독립국가도 많이 나타나게 되었고, 사조적으로는 자유나 해방의 사상이 강하게 대두되게 되었다. 신학계 역시 1960년대부터 남미에서는 해방신학이 나타나게 되었고, 1970년대는 한국에서는 민중신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남미의 해방신학은 강대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경제적 독립, 독재주의, 나아가 부정부패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신학적 운동이었고, 한국의 민중신학 역시 해방신학과 유사하게 권력을 가진 자들의 독재적 억압으로부터 민중들의 살 권리를 통한 민주주의 회복을 목적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는 민중이 신학의 대상이 된다는 것으로 독일 유학파 안병무 교수나 연세대학교 서남동 교수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민중신학은 진보계열의 교단과 목회자, 교수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한국의 민중신학은 독자적, 자생적 토착신학이라는 점에 세계 신학자들은 그 의미를 높이 부여하고 있다. 내용의 중요성과 더불어 남의 나라 신학의 답습이 아닌 자신들의 신학을 정립했다는 데에 큰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거의 유사기간, 즉 1970년대 시작에 즈음하여 미국에서도 독자적 신학운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대표적인 것은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한국의 민중신학의 기조처럼 미국 내 흑인들이 받는 억압과 한을 신학적으로 풀어 낸 것으로서 James Cone(1936-2018)의 흑인신학(Black Theology)이다. 이때까지 미국은 라인홀드 니버가 주로 신학 역사를 이끌어 왔었다.

사실, 라인홀드 니버의 윤리신학은 현대 윤리신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그는 미국 내 교계나 신학계, 나아가 정치가들로부터 무수한 강연 초청을, 나아가 영국의 사조협회 “Gifford 강연” 에 여러 차례 초대될 만큼 세계적인 신학자로 크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후, 미국에서는 니버 이후 거의 두번째 신학으로 흑인신학이 나타난 것이다. 이를 필두로 매리 델리와 로즈매리 류터(Rosemary Radford Ruether)에 의해 활성화된 여성신학(Feminist Theology)이 나왔으며, 하버드대 교수였던 Francis Faiorenza의 생태신학, 생태여성신학(Ecofeminist Theology)도 나오게 되었다. 이들의 신학사상, 즉 흑인신학이나, 여성신학, 또는 생태환경적 여성신학 등은 주로 산업화나 과학주의, 또는 상업주의에 의해 잃어버린 인간존엄과 주권적 권리를 회복하자는 것이 중심으로 그동안 유럽의 교리나 철학중심의 신학에서 벗어나, 실제 인간 정체성과 생활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80년대 초중반부터 해외 유학의 길을 활짝 열었다. 데모 중심의 골치아픈 대학생 들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 좀 시끄러움을 덜자는 의도에서였다. 학생들은 주로 미국이나 학비가 안드는 독일로 유학을 많이 갔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유전성을 남기고자 하는 습성이 있어서 독일 출신 선배들은 독일 유학을, 미국 출신 선배들은 미국을 권장하여 각각 자신의 취향이나 학업적 풍토가 맞는 곳으로 유학을 갔다. 독일 유학생들은 이성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였고, 미국 유학생들은 대체로 21세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 복음주의적 노선의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조건과 환경이 맞는 곳에서 교육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 두 그룹 모두 20세기 후반부터 외부 학문적 환경에 압도당해 복음주의적 신학노선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이나, 미국의 자유와 인권중심 신학에 후기현대주의 사조 영향과, 설상가상으로 과학 기술주의의 강력한 바람을 맞았기 때문이다. 복음이니, 구원이니 하는 복음주의적 성경말씀이 이성에 의해 기독교 성경에 대한 비판과 실증주의의 사고가 강조되어 묻혀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명문 대학교의 신학부에서 목회학이 퇴진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환경 영향 때문이다.

한국에서 신학은 이렇게 점점 일반 종교 철학이나 사회학적 성격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지금 세계신학은 인간의 죄성, 부패와 타락, 그로 부터 변화로 인한 회복이 신학의 주제가 아닌, 자유와 권리, 삶에서의 편리 및 육체적 안락같은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인본주의 신학으로 일반화 되어 가고 있는 입장인데 지금 한국도 그 입장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라 한국에서 복음주의 노선 유지와 이에 의한 교회회복 운동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한국교회와 신학계는 인본주의 신학에서 벗어나기 위한 집중적인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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