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매들린 L. 반 헤케가 쓴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이라는 책이 있다. 미국 NBC 11부작 드라마로도 유명한데 ‘블라인드 스팟’은 자동차를 운전할 때 백미러에 나타나지 않는 사각지대를 말한다. 또 자신이 뭘 모르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도 ‘블라인드 스팟’이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본다던가, 중요한 것을 다 잊어버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매이는 것, 남의 결점이나 세상 이치는 많이 알면서 정작 자기 결점은 모르는 것, 이런 것이 ‘블라인드 스팟’이다.

요즘은 정보의 홍수시대라 사람들은 다 보거나 주워들은 게 너무 많다. 문제는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보지 말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보고 듣는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마치 잡탕밥에 헛배만 부른 사람들처럼 산다.

베르너 티키 귀스텐마허(Werner Tiki Küstenmacher)는 『단순하게 살아라』라는 책에서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쓰레기”라며 ‘정리의 힘’과 ‘버리는 기술’이 삶을 단순하게 한다고 했다. 단순할수록 좋고, 단순하기 위해서는 초점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본문에 오랜 세월 볼 수 없어서 단순하게 살았던 주인공이 등장한다. 눈을 떠보니 신세계, 진실을 보게 되고, 자유를 얻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하다. 하지만 갑자기 삶이 너무 복잡하다. 이웃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부모와의 관계도 틀어지게 됐다. 불편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소리라도 질러야 할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 사람의 단순하게 사는 모습이 압권이다. 초점을 예수께 맞춘 사람, 진실을 붙잡는다. 적당한 결심이 아니다. 심지어 출교라는 사람 죽이는 끔찍한 압박 카드에도 흔들림이 없다. 출교가 두려워 부모마저 책임질 일이 있으면 ‘니가 책임지라’고 떠넘기는 상황이지만 투쟁을 시작한다. 용기와 지혜가 돋보이는, 9장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본문, 주인공의 고군분투(孤軍奮鬪)가 너무 멋지다.

한 가지 아는 것

출교 협박도 비난도 불사하는 태도, 누가 뭐라든 상관없다. 왜? 한 가지 아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한 가지 아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투다. 그래서 주변 사람이든 바리새인이든 당당하게 맞선다. 자기 아는 그 한 가지가 너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나이 많아서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정신이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자기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사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니까 한 제자가 이 대학자의 멍청해진 모습이 너무 기가 막혀서 이렇게 물었단다. “선생님, 지금 아시는 게 뭡니까?” 그랬더니 아이작 뉴턴이 “두 가지는 알지!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가 내 구주시라는 것. 그건 확실히 알지” 그러셨단다.

본문의 주인공은 지금 자기가 보는 것과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자기 눈을 뜨게 한 것은 분명히 안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그의 인생은 늘 고군분투하는 인생이었다. 평소처럼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그 날도 예수님과 그 일행이 길을 가다가 자기에 대해 자기들끼리 논쟁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본인의 죄 때문인가 부모의 죄 때문인가” 분통 터지는 소리다. 이렇게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누군가의 죄 때문이란다. 청각이 발달해 너무 잘 들린다. 물론 못 들은 척한다. 이것도 이 사람 입장에서는 고군분투일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침을 뱉고 그걸 흙에 이겨서 눈에 발라주셨다. 맹인 눈은 눈이 아닌가? 먼지만 들어가도 아픈데 침을 이긴 진흙을 바른 것, 성질 고약한 사람 같았으면 병신 취급한다고 난리 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참는다. 그리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2km를 가라는 말씀인데 지팡이 짚고 더듬더듬 가면 몇 시간 걸릴까?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은 족히 가야 한다.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그런 생각 들지 않았을까? 그래도 끝까지 갔다. 그리고 말씀대로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었다. 놀랍다. 앞이 보인다. 고군분투의 결과다.

“아, 세상이 여기가 이렇게 생겼구나!”,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감격하며 돌아오는데 시비가 벌어졌다. 맹인은 지팡이 짚고 막대기 들고 다녀도 그건 죄가 아니지만 안식일 날에 눈을 뜬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그건 죄라는 것이다. 침으로 흙을 이긴 것도 반죽이라며, 이걸 안식일에 음식 만드는 일을 금하는 것과 연결해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말이다. 정말 치졸하다. 그리고 “안식일 범하게 만든 자가 누구냐? 이렇게 하라고 한 자를 대라”고 다그친다. 그 사람도 안식일 범한 죄인이라며 난리친다. 생각지도 못했던 시비가 벌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부모에게 꼬치꼬치 묻고 부모는 그가 장성하였으니 본인한테 물으라 하고, 사람들이 안식일 범한 죄인이라며 자신도 예수님도 죄인으로 몰아가는데 이 사람은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라 한다. 출교라는 압박카드에도 “뭔 소린지 몰라도 예수께서 내 눈을 뜨게 했다”, 이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춘다. 복잡하게 율법조항 들먹거리며 이것저것 따지기만 하는 바리새인들과는 너무 다르지 않나? 바리새들은 지식은 많았지만 맹인이었던 이 사람이 아는 그 한 가지를 모른다. 그들은 100-1이 0가 될 수 있고, 0+1이 ∞가 될 수 있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펄쩍 뛸 사람들이다. 확실한 아는 한 가지! 이게 우리가 사는 힘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

맹인이었던 사람의 고군분투는 감정 싸움도 자존심 싸움도 아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 그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의 분명한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3절), 바리새인들이 부모를 통한 목적달성에 실패하자 맹인이었던 이 사람을 다시 소환했는데 그 자리에서 한 증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언은 출교라는 엄청난 결과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다. 인생을 건 믿음의 고백,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결단이다. 이 결단이 중요하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소설 중에 『다시 오신 예수』라는 단편이 있다. 이 책에 보면 치유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해서 예수께서 잠깐 세상에 다시 와서 보셨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시 오신 예수께서 한 알코올 중독자에게 다가가셔서 “왜 이렇게 살아?” 물으셨더니 “절름발이였던 저를 예수님이 고쳐주셨지만 절름발이일 때는 얻어먹어서 괜찮았는데 걸으니까 벌어먹는 게 너무 힘들어서요. 그래서 도로 알코올중독자가 됐어요.” 그랬다는 것이다. 또 다시 오신 예수께서 조폭을 만나 “왜 이렇게 살아?” 물으셨더니 조폭은 “제가 원래 맹인이었는데요. 맹인으로 살 땐 몰랐는데, 눈 뜨고 보니까 세상이 너무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고 매스꺼워서 도저히 살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조폭이 됐지요." 그랬단다. 맹인이었던 9장의 주인공 같은 결단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맹인이었던 이 사람인들 왜 살길을 몰랐겠나? 하지만 복잡한 계산을 하지 않는다. 그저 사실만 말하기, 그는 생각을 단순화했다. 확실히 아는 거니까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예수님만 증거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얼마나 건강한 생각이며, 얼마나 건강한 사람인가?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프랑스 일주를 뜻하는 ‘뚜르 드 프랑스’(le Tour de France)에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7연승을 한 유명한 미국의 전 사이클 선수다. 도핑 위반 혐의로 모든 기록을 박탈당하고 사이클계에서 영구 추방되기는 했지만 그는 암을 극복한 사람, 그가 쓴 소책자, 『1%의 희망』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암 진단을 받고 절망했지만 이겨야겠다는 강한 의지로 투병하면서 지낸 지 딱 3년째 되던 날인 1999년 10월 2일, 그날을 ‘까르페 디엠(Carpe Diem)’이라 정하고 그날을 기념했다.” 까르페 디엠, ‘오늘을 즐기라’는 말이다. “단 1%의 희망만 있어도 달린다”는 불굴의 의지가 3년을 이기게 했다. 건강한 사람 아닌가? 기록 박탈이 문제가 아니다. 암을 극복하고 7연승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맹인이었던 사람도 마찬가지다. 비록 날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맹인으로 살았지만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멀쩡한 바리새인들보다 낫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증언을 믿지 않았다. 사람이 못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은 다른데 바리새인들은 안 믿는 사람들, 그들은 계속 불신한다. 차라리 못 믿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안 믿는 것은 안 된다. 못 믿는 것은 의심하는 건데 있을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안 믿는 사람은 강퍅한 사람이다.

그들이 꼬신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4절), 자기들 입맛에 맞게 거짓 증언을 강요한 것, 간증을 바꾸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똥줄이 탔을까?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기 위해 그들이 또 묻는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26절). 그들이 다그치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절). “당신들도 예수님의 제자 되려 하시나?” 출교 걱정은 단 1도 없다. 너무 담대하다. ‘예수님의 제자’, 바리새인들에게는 욕이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약이 올랐으면 욕을 했다. 그리고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한다(28절).

30절에 보면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모세의 제자라면서 그것도 몰라?’ 이게 맹인이었던 사람의 반응이다. 대단하다. 모세의 제자,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바로 모세가 준 율법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준 생각의 틀, 옳았던 때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틀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데 그게 생각과 이성과 의지를 가진 인간의 한계임을 알아야 하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 틀로는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상대적으로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제대로 보게 되었다.

맹인이었기에 맹인에 관한 말씀을 잘 알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있다. 하나님이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사실과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이 수많은 기적을 베풀었지만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눈 뜬 기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5-6), 맹인이 눈 뜨는 기적은 메시야가 와서 베풀 기적 중의 하나라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도 모르는 말씀을 알고 있었던 것,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동지 한 사람 없이 끝까지 예수님을 증언하는 맹인, 대단하다.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잘 산다고 주님이 함께하시는 게 아니다. 돌이켜보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 하나님이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시지만 영혼은 파리했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시106:15). 그런데 이 사람은 다르다. 자기 신상 문제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아예 예수님과 운명공동체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믿는다는 게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끝까지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 주님은 이런 신앙을 귀하게 여기신다.

결과는 출교였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담대하게도 율법 선생들에게 율법을 가르친다. 누가 말하든 진리라면 받아들여야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저 자기들의 통념에 따를 뿐이다. 그들의 결정을 보라.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아예 쫓아내어 보내니라”(34절), 바리새인들이 화가 났다. “감히 죄인 주제에 누굴 가르쳐?” 알량한 권위로 출교(excommunication)를 결정한다. 쫓아낸 거다. 똑똑하다고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이 무식하고 별 볼 일 없는 맹인에게 말이 딸리니 비겁하게 힘으로 누른 거다. 결국 끝까지 당당한 우리의 주인공은 눈뜬 것으로 인해 유대 공동체에서 출교를 당하고 말았다. 부모들이 그토록 걱정했던 결정이 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신앙이 투쟁의 연속이란 것, 예수 믿는다고 만사 OK가 아니다. 그리고 시험이 외부에서만 오는 것도 아니다. 내 안에서도 생기는 것, 과거의 습관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맞서 싸워야 한다. 외롭더라도 고군분투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90년경에도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서 양다리 걸치고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기 위한 메시지였다. 세상에서 고립될까봐 적당히 타협하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출교로 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 본문의 주인공처럼 오직 그리스도께만 초점을 맞추고 서러웠던 과거나 암담한 현재나 불확실한 미래를 잊고 한 가지 아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밝은 미래가 활짝 열릴 것이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희우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