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정성구 박사 ©기독일보 DB

카이퍼와 이승만은 그 시대에 걸출한 대인(大人)이었다. 그들은 모두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요, 기도자요, 문필가요, 대설교가이자 연설가였다고 앞에서 여러 번 말한 바가 있다. 교회를 개혁하고 정치를 개혁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사회를 개혁하는 것은 이른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이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개혁이란 ‘정치지도자들이 미처 못 본 것을 살필 뿐만 아니라 약자를 돕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참된 지도자일수록 국민의 아픈 곳과 가려운 곳을 찾아내 치유하는 역할을 말할 것이다.

우선 카이퍼와 이승만의 사회 개혁의 관심을 말하기 전에, 16세기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사회적 관심을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요한 칼빈은 27세에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요’(Institute)를 출판했다. 이 책은 성경을 가지고 기독교 교리 체제를 완성시킨 불멸의 대작이었다. 이 책 한 권으로 말미암아 칼빈은 그의 조국 불란서에서 체포령이 내려졌고 사형으로 처형 될 몸이었다. 위기를 직감한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는 제네바에 머물 마음은 없었으나 그곳에 앞서 와서 종교개혁을 시작했던 파렐(Farel)을 만났다. 밤중에 파렐은 제네바 호텔에 머물고 있는 칼빈을 찾아와 “당신같이 기독교 교리체계를 완성한 젊은이가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함과 동시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과의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난민들과 주변국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으니 자연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니 칼빈 당신이 제네바 교회를 안정시키고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칼빈은 본래 종교개혁의 의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몸도 병약하고 심약해서 자기에게 꼭 맞는 일은 조용한 곳에 가서 쉬면서 글이나 쓸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의 권면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급했던 파렐은 칼빈에게 경고하면서 “만약 당신이 제네바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즉시 천벌을 내일 것이다!”라고 막말을 쏟아냈다. 이때 파렐의 천둥 같은 목소리가 칼빈의 마음을 요동쳤다. 칼빈은 그의 목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제네바에 머물 것을 결심한다. 당시 제네바는 국제도시였던 만큼 환락의 도시였고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이 극에 달했고, 민심은 흉흉하고 아무도 그를 추종하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칼빈은 2년 만에 기득권 세력에 밀려나 스트라스부르크로 축출되는 수모를 겪었다.

제네바는 칼빈이 기득권 세력 즉 로마 카톨릭의 잔당들과 자유주의, 이단들이 섞여 있는 그곳에서 일 하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또한 제네바 의회는 칼빈에게 협력하기보다 오히려 칼빈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칼빈의 모습을 그린 성화 약 80종을 보면 코가 뾰족하고 흰자질이 많으며 마치 마귀할멈같이 그려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예술에도 중립이 없고, 문학에도 중립이 없다. 칼빈을 모함하기 위해 요즘 같이 ‘가짜뉴스’가 그때도 많았다. 그러나 칼빈은 신학자요, 설교가요, 교의학자로서 성도들의 일상생활 즉 제네바의 사회생활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밀려오는 피난민들에게 자신의 집을 개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가 먹는 것 외에는 피난민들이 사용하도록 했다. 심지어 칼빈은 하수도 문제까지 관여할 정도였다. 또한 칼빈 시대에는 일단 발병하여 걸리면 죽는 악성 괴질, 콜레라는 일반 사람이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때 칼빈은 자기 성도가 콜레라에 걸려 죽어갈 때 기어이 그 성도를 심방해 구원의 확신을 주었다.

칼빈을 멘토로 삼았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각과 정치는 좀 더 역동적이고 진취적이었다. 수상 시절에 카이퍼는 주로 교육개혁과 시위문화를 다스렸다. 당시 사람들은 불란서 혁명의 사상에 물들어 “하나님도 없애고 주인도 없애자!(No God No Master!)”라는 구호를 외치며 막 나가던 시대였다. 당시 화란은 잘못된 ‘불란서 혁명’을 모델로 삼아 기성제도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사상으로 가려는 절박한 시대였다. 이때 카이퍼는 의회에서 왼손에는 포켓 신약성경을 들고, 그들의 논리가 부당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뿐만 아니라, 그 천둥 같은 목소리로 의회의 사회주의 자들과 청중들을 장악했다. 그에게는 ‘논리는 논리로 세계관은 세계관으로 싸워야 한다!’확신이 있었다. 철도 파업에 이어 마차 파업이 일어났을 때이다. 당시는 기차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기차역까지 가는데 마차와 마부가 필요했었다. 그런데 마부들이 임금인상을 이유로 파업에 들어갔고 반대편 다수당은 마부들의 손을 들어줬다. 수상이었던 카이퍼는 여당이 소수당이므로 정책을 시행할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카이퍼는 용감하게 여왕의 허락을 얻고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선거를 하여 파업과 수송 대란을 잠재웠다. 역시 카이퍼의 승리였다.

이승만은 카이퍼처럼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고 믿었다. 정치는 말단 국민과 시골 노인네들까지 대통령의 뜻이 전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나라를 세우고 여기저기 공산주의자들이 벌린 4.3사태, 여수반란 사건, 대구와 제주 사태 등의 저항이 있었지만, ‘농지혁명 완수’ ‘의무교육’을 실시해 세계에서 문맹이 없는 나라를 만들었다. 또한 전란 중에서도 ‘우리도 원자력을 가져야 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장인순, 이창건 같은 원자력 1세대를 유학 보내어 자유대한민국의 큰 틀을 만들었다.

카이퍼도 이승만도 틀림없이 둘 다 하늘이 내신 지도자인 것이 틀림없다!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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