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공적신학의 실천적 한계점들

1.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전략의 부재 경향

안승오 교수
안승오 영남신대 선교신학 교수

공적신학은 기독교가 공적 영역에서 공공선을 위하여 바로 역할을 해야 함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따라서 공적신학의 최종적 목표는 공적인 영역에서 공공선이라는 구체적인 열매를 맺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열매들을 맺으려면 좀 더 구체적인 전략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단계마다 상황마다 어떤 자세와 방식으로 어떤 목표들을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지침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공적신학을 주장하는 책이나 논문들을 보면 대부분 아주 원론적인 방안제시들이 주류를 이루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1) 공적 상황에서 비종교인과 타종교인들과 열린 대화를 하며 소통해야 한다. 2)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서 기독교적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3) 공공선을 찾아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 4) 평신도들이 공적 삶의 이슈들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삶에서 공공선을 실천해야 한다. 5) 교회는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올바른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는 등의 목표들과 실천사항들이 주로 제시된다.

그런데 위와 같은 방안들은 마치 ‘모든 국민들이 밥을 잘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게 해서 건강하고 행복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과 같이 다소 원론적인 주장에 가깝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공적신학이 목표하는 바를 성취하려면 좀 더 구체적이고 효율적인 전략이 제시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공적신학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생각 아래 목표를 제시하고 주장하면 그것이 그냥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보쉬가 언급한대로 “그리스도는 참으로 교회와 세계 둘 다의 주인이시며 머리이시다. 그러나 세계는 그리스도의 몸은 아니다. 오로지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즉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 세상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이기심과 탐욕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 극대화에만 관심을 갖는 세상과 대화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고 그것으로 공공선이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관점을 지닌 공적신학은 원론적인 주장은 있지만 그 주장을 구체화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전략은 빈약해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공적신학은 자칫 상아탑 속에서만 외쳐질 뿐 실제적으로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열매로 이어지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2. 목표 달성을 위한 힘에 대한 관심 부족 경향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힘의 문제이다. 힘이 있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전략도 만들고 인적 자원 물적 자원도 동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적신학의 목표를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 중 하나는 역시 기독교 교회다. 즉 교회가 공적신학을 달성할 수 있는 힘과 전략을 갖출 때 공적신학이 추구하는 바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인데, 공적신학의 논의들에서는 교회의 힘을 갖추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현실적으로 교회의 잠재력은 갈수록 약화되는 모습이다. 물론 일부 교회들은 외적으로 상당한 힘과 권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교회들 역시 세상을 향해 건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이러한 교회 약화의 뿌리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바로 교회 자체의 윤리적 결함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경우 몸집은 많이 커졌지만 언제부터인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지도자들의 각종 비리와 추문으로 대사회적 이미지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공공성은 고사하고 자정능력조차도 상실한 모습이다. 사회적 신뢰도가 이렇게 낮은 상황에서 교회의 공적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러한 윤리적 수준으로는 교회가 공적영역에서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먼저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교회는 또한 세속화 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 교회가 공적역할을 감당하려면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세속적 가치관을 이기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해야 하는데, 많은 교회들은 세속화에 밀려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맥그라스는 “많은 개신교 교파들은 기독교의 지적 전통이 간직한 풍성함을 잃어버렸으며, 신비적인 요소와 초자연적 존재에 무지한 상태가 되었는가 하면, 그들의 구성원을 뉴 에이지와 복음 운동에 뺏김으로 말미암아 혼란을 겪고 말았다.”고 분석하였다. 즉 교회는 공적영역에서 본이 될 만한 윤리적 삶을 살지도 못하고, 그러한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공급하지도 못하고,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힘도 없는 형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공적신학이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세상에서의 공적 영향력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로 끝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3. 추구되는 과제들의 지나친 방만함 경향

공적신학은 공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영역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태 등이 관심 영역이 되며, 그 모든 영역에서의 문제 해결을 과제로 삼는다. 윤철호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의 사회적 선교 즉 공적신학의 실천 영역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불의한 독재 권력을 타파하고 정의롭고 민주적인 정치 및 사회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 가난을 극복하고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경제적 정의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 탈북민, 외국인 노동자 등 법의 사각지대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 맘몬주의, 쾌락주의 등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을 변혁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 사회적 정의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 100세 시대를 맞아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는 고령자들의 치유와 건강의 증진을 위한 노력, 창조세계를 보전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노력 등을 포함한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공적신학의 과제들은 그 범위가 매우 광범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의 문제들은 한 국가의 정부도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인데 인적 물적 자원 등에서 훨씬 열세인 교회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은 교회의 역량을 벗어난 것일 수 있다.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함에 있어서 기본은 목표의 포커스를 작게 잡는 것이다. 힘과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는데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방만한 목표 선정의 문제점에 대하여 이미 스티븐 니일은 “모든 것이 선교면 아무 것도 선교가 아니다.” 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공적신학이 고민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실제로 공적신학에 대한 세바스찬 김의 분석을 정리한 윤철호도 공적신학의 문제점 중 하나를 ‘관심주제가 너무 넓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매우 광범위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고, 전문가들마저도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매우 복잡다단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슬람이 강한 국가들의 경우는 이슬람 성직자가 국가의 중요한 사항을 관장한다. 세부적인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약한 성직자가 국가 전체의 경영을 주관하니 이슬람 국가들이 대부분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 지도자들 또는 신학자들 역시 위에서 언급한 모든 공적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사회의 모든 공공 영역에서 목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자칫 이슬람 국가 성직자들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물론 교회는 큰 틀에서 하나님의 뜻을 담은 성경적 원리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조차 서로 통일된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독교가 공공영역에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을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4. 바른 목표 설정의 미흡 경향

공적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는 ‘공공선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공공선을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면 무엇인지 추정할 수 있겠지만,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들어가면 ‘공공선’은 상황마다 사람마다 집단마다 다른 것을 공공선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현실적으로 일치된 공공선을 설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공공선이라는 말 자체가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 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윤철호도 세바스찬 김의 견해를 도표화하면서 공적신학의 문제 중 하나를 “공적(public)이란 의미의 모호성” 이라고 언급하였다.

실제로 무엇을 공공선이라고 볼 것인지는 보는 입장에 따라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의 매우 심각한 이슈 중 하나인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것이 공공선인지 합법화 하지 않는 것이 공공선인지는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조차 관점이 다르다. 또 자유경쟁보다 평등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공공선인지 평등을 고려하면서도 자유경쟁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공공선인지도 관점에 따라 매우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어떤 하나의 입장을 공공선으로 보면서 그것을 사회에 적용시키려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뉴비긴은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어떠한 특정한 정치체제도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과 완전히 동일시되지 못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수긍된다. 정치에 절대성을 개입시키는 것은 언제나 파국을 초래하였다.” 고 설파한 바 있는데 공적신학이 깊이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공적신학은 정의와 평화의 성취를 중요한 목표로 삼고, 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교회와 성도들이 헌신해야 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설사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사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 추구에만 바쁜 세속화가 확산된다면 과연 복음이 공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 세속사회에서는 기존 사회에서 진리 인식의 기초로 인식되던 기독교 전통이 제공한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가 더 이상 효력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사실(fact)을 추구하는 자연과학적 인식은 보편타당한 진리로 공적 영역에서 수용이 되지만, 종교나 도덕 같은 것들은 사적 영역에서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즉 기독교 신앙은 사회의 공적 영역으로부터 추방되고 사적 영역 즉 교회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수용되는 진리로 전락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적신학은 정의와 평화와 같은 공공선 성취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과연 바른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오히려 공공선 자체보다는 사회의 공공선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기독교 복음과 기독교적 가치관이 사회의 핵심적 상식이 되도록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 뉴비긴이 언급한대로 “모든 사람은 항상 불가피하게 자신이 속한 또는 선호하는 문화와 세계관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사고와 행위에서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한 사회를 바꾸려면 문화와 세계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핵심적인 상식을 바꾸어야 한다. 이 핵심적인 상식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바꿀 때 기독교가 진정으로 공적영역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네오막시스트들이 한 사회의 기존 상식을 뒤엎고 막시즘의 사고가 상식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진지전을 벌인 것처럼 기독교 복음과 기독교적 가치관이 사회의 핵심 상식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공적신학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V. 나가는 말

몰트만은 “신학과 교회가 현대의 문제들에 부심하고 관계하면 할수록 자신의 기독교적 정체성이 더욱 더 위기에 떨어진다.”고 하면서 ‘정체성’과 ‘사회참여’의 딜레마를 언급한 바 있다. 이형기도 이것을 좀 더 풀어서 “복음과 교회의 정체성에 안주하는 한 교회의 사회참여를 소홀히 여기게 되고, 교회의 사회참여에 전념하다 보면 복음과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헤메지 않나 하는 문제가 오늘 우리 한국에서까지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공적신학은 위에서 언급한 ‘정체성’과 ‘사회참여’ 중 후자에 더 비중을 두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종교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교회 즉 세상에 깊은 관심을 두고 세상의 문제 해결을 위해 힘쓰는 교회들은 복음 열정의 약화와 그로 인한 교회의 약화가 일어나 쇠퇴하면서 사회를 섬길 수 있는 역량마저 점점 더 상실해가는 반면, ‘정체성’을 강조하는 교단들은 역동적으로 성장하면서 오히려 사회봉사도 잘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공공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정체성 강화나 성장 등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세상을 잘 섬기기 위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건강한 교회의 존립이다. 유럽 지역처럼 교회 자체가 약화되면 ‘사회참여’ 는 그저 희망사항이 될 수 있다. 공적신학이 강조하는 공적 영향력도 교회가 세속화의 물결에 흡수되지 않고 교회의 정체성을 잘 지킬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자체가 약화되거나 사라져버리면 공적신학을 실천할 일꾼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정체성 유지와 강화는 공적영향력의 근본적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적신학에서 이러한 점들이 함께 논의되면서 그 한계점들을 잘 보완할 필요가 있어 보이며, 이를 위해 추후에 좀 더 구체적인 논의들이 전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끝)

※ 참고문헌 등 문의: aso06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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