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공적신학에서 갖게 되는 의문점들

1. 순진함의 문제

안승오 교수
안승오 영남신대 선교신학 교수

공적신학은 교회의 공적 영역에서의 책임을 일깨워주고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전한다는 점에서 분명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공적신학의 논의들을 보다 보면 몇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된다. 가장 먼저 갖게 되는 의문점은 공적신학은 지나치게 순진한 관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공적신학의 대표적 학자 중 하나인 스택하우스의 경우 모든 인간은 합리적인 이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적 은혜와 역사가 전 세계에 임하기에 사람들은 ‘공통의 은혜’를 인식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대화가 가능하고 그런 대화를 통하여 세상을 좀 더 정의롭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 때문에 공적신학은 비종교인들 그리고 타종교인들과도 대화를 통한 공동선 추구를 강조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세상을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점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핍박하는 공산권이나 이슬람권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 그런 사회들은 합리적 이성을 소유하고 공통의 은혜를 인식하면서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심지어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개인들 그리고 각 집단들의 관심과 이익이 상충되는 경우가 매우 많고 이러한 충돌은 대화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갈등과 충돌의 가능성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주장을 김현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자유주의에서 윤리이론은 모든 가치판단의 문제를 개인의 선택의 자유에 맡겨두기에 개인의 ‘결단이론’이 되고 만다. 문제는 어떤 개인이 내린 결단이 옳은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결단 이론으로서 윤리는 결국 ‘곤경에 처한’ 윤리가 되며,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는 개인 간에 갈등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등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공통의 은혜’를 인식할 수 있고, 세상이 대화나 토론을 통해서 기독교가 원하는 공공선을 쉽게 도출하고 수용할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세상이 세속화 될수록 세상은 스스로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기독교의 진리를 무시하거나 거부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모두에게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가 있으므로 대화를 통해 공통의 은혜를 찾을 수 있다는 관점은 지나치게 순진한 관점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 기독교 정체성 약화의 가능성

앞에서도 보았듯이 공적신학의 방법론은 매우 포괄적이다. 공적신학의 재료는 성경, 전승, 이성과 경험 등이며, 공적신학에서 대화의 상대자는 비기독교인 그리고 타종교인들도 포함된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사회를 위한 도덕적 영적 체계를 수립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공공선을 이루어가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각 문화들과 종교 전통들이 제시하는 도덕적 영적 기준들은 종종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로운 공존을 하면서 공공선을 찾는 일은 공적신학에 참여하는 모두는 서로의 것을 기꺼이 양보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공적신학은 공공선을 중시하기에 기독교의 핵심 진리도 양보할 수 있어야 공공선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데 공적신학이 이처럼 세상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을 제일의 과제로 삼는 번역 신학을 추구하게 되면 기독교는 자신의 독특한 언어를 상실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오히려 세상에 자신을 ‘순응’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교회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의 이야기에 의해 지배당하며, 세상의 종속기관으로 전락될 수 있다고 하우어워스는 경고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가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는 것과 같이 다른 종교인들도 그들의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므로 ‘정치적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olitical pluralism) 견해를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즉 공적신학은 종교다원주의로 이어지고 이것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잠재적 위험성이 있음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3.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편중된 해석 경향

앞에서 살펴 본대로 공적신학의 주된 이론적 근거는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가 공적 영역에서 정의와 평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교회 역시 공적 영역에서 정의와 평화를 세우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뉴비긴은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왕권은 인간 삶의 사적인 면뿐 아니라 공적인 모든 인간사 전반과 연관되어 있다.” 라고 주장한다. 윤철호도 공적신학을 강조하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의 통치의 실현을 목표로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교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선교를 위한 원형이 되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언하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를 과연 정의와 평화의 나라로만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에 그러한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정의와 평화만이 예수 사역의 주된 목적이었다면 예수는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킨 후에 백성들이 억지로 자신을 왕 삼으려는 것을 피하여 혼자 산으로 가셨고, 부활 후에도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즉 정치적 독립의 때를 물었을 때에 정치적 독립을 위한 지시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제자들이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사렛에서 모든 귀신들린 사람들과 병자들을 고치신 후 사람들이 예수의 다른 동네로 가고자 함을 만류할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눅 4: 43-44)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의 사역의 주된 목적이 병 고침이나 가난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 전도에 있음을 천명하셨다. 이런 점을 보면서 핸드릭슨은 “결국 전도가 주된 일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결국 말씀을 통해서이다.”라고 주장한다. 하나님나라를 가져오신 예수의 사역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이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사역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해석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계속)

안승오(영남신학대학교 교수, 선교신학)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승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