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21년 2월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석학인 하버드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Michael Sandel)가 ‘능력대로 하면 공정한가?’라는 강연을 했다. 정의를 “기본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샌델교수는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사회는 참 정의로워질 것”이라 했다.

이날 강연에서는 능력주의를 비판했는데 스포츠계에서 큰 성공을 이룬 사람을 예로 들며 엄청난 보상을 받는 사람은 두 가지를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이 지금 누리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열심히 연습했겠지만 다른 사람은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누군가 “타고난 게 다를까?”를 묻자 샌델 교수는 “타고난 재능을 발견하는 것도 능력”이라 했다. 그리고 한 참석자가 “그 능력 발견도 상황과 환경이 되어야 가능한 것 같다”고 하자 “맞다”며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나고도 자기가 3루타 친 줄 안다”고 했다.

샌델 교수는 카지노 사업으로 큰돈을 버는 것도 능력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환자 치료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 더 가치있고 중요하다며 “사회적 보상 기준은 ‘가치’가 있어야 하고, 공동선(善)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본문에 능력있고 가치있는 사람이 등장한다. 침례(세례)를 베풀며 온 유대 땅을 뒤흔든 침례(세례)요한, 요한복음 1장에 벌써 3번째 등장한다. 엘리사벳 뱃속에서부터 성령 충만했던 사람이기에 예수님마저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라고 극찬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자신의 노력과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생각은 단 1도 없었다. 그저 자기를 ‘광야의 소리’라고 한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조사단의 조사를 받다

갈급한 사람들이 몰려와 회개하는, 인기 절정이 되었을 때 요한이 지금 온 유대 땅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기득권을 누리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당국자들이다.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세상적 기득권층,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누렸고, 바리새인들은 세상적 권세보다는 종교적 기득권을 누린 사람들, 소수 정예 율법주의자들이다. 총 5천 명 정도였는데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릴까봐 그가 메시야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군중이 따르는 위인, 등한히 할 수 없다. 무질서나 로마 사람과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흥분상태의 종교운동이라 더 민감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한순간에 꽝이 될까봐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네가 누구냐?”(19절) 물었는데 기록자 요한은 ‘유대인들’이 물었다고 했다. 이 표현은 공관복음서에서는 희소한 표현, 요한은 무려 70번 정도 사용한다.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는 “그들은 주로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며 이 표현은 원칙적으로 ‘예수님의 대적자들’이라 했다. 그들이 침례(세례) 요한 정체성 파악을 위한 조사단을 꾸려 파견한 것이다.

그들은 침례(세례) 요한이 만일 메시아이거나 선지자라면 그에게 침례(세례)를 미리 받아서 상대적 우월감을 즐기려 했을 수도 있다. 종교의식을 더 해 신앙을 인정받는 것, 종교적 날개 아래 보호받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게 큰 문제다. 자기들의 죄에 대해 돌아보려는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도덕적인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존경받으려고 할 뿐이다. 자기의(義)로 천국갈 수 있다는 착각과 교만에 빠진 사람들, 혈통(아브라함의 혈통)으로나 육정(자기의)으로 구원받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13절). 그들이 찾아와 던진 질문이 “네가 누구냐?”였다. 역으로 “너희는 누군데?” 묻고 싶은 사람들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군지 몰라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 있다. 그저 욕심만 가득 차고, 권세만 믿고 기세등등할 뿐이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꼬마 감자가 엄마에게 “나 감자 맞아?”하고 물었더니 엄마가 “당근이지” 그 말에 충격을 받고 꼬마감자가 가출을 했단다. “역시 나는 주워왔었나봐” 하며 방황했지만 오래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아 집으로 컴백했다. 마침 할머니가 계셔서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 나 감자 맞아요?” 할머니는 경상도 출신이라 “오이야” 그러셔서 “난 역시 감자가 아니구나” 충격을 받았단다.

우리는 누군가? 먹고사는 것이 삶의 목적인 사람들인가? 아니다. 좀 더 고상한, 스스로 만족할 만한 가치있는 삶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바 되었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만들어졌고(창1;26),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공부 『새로운 삶』을 공부할 때 제1 가치관은 “우리는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제2 가치관은 “소명을 발견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부름 받은 사람들, 소명 따라 살아야 한다.

소명인지 아닌지는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하면 소명일 가능성이 높다. 첫째는 즐거워야 하고, 둘째는 잘해야 하며, 셋째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것을 하면 즐겁다. 즐거우면 열심히 하게 되고 잘하게 된다. 그리고 잘하면 보람을 느끼는 거다. 소명 받은 침례 (세례)요한은 광야에서도 가치있는 삶, 보람이 있는 삶을 충실히 살고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침례(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아주 담대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어떻게 보면 너무 자신만만해서 교만해 보일 정도다. 물론 그의 자신감, 자존감의 원천은 뚜렷한 신분 의식과 사명감이었다. “네가 누구냐?”라는 조사단의 세 번의 질문에 요한은 세 번 다 부정어로 대답한다. 첫 번째 대답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I am not the Christ,에고 우크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라는 질문 때에는 “나는 아니라”(I am not, 우크 에이미”라고 대답했고, 세 번째는 “네가 그 선지자냐?” 신명기에 나오는 ‘그 선지자냐?’라는 질문인데, 대답은 “No”(헬라어로 “우”) “아니라니”였다. 물을수록 짧고 단호하다.

흔히 사람들은 물을수록 대답이 흐릿해질 수도 있는데 요한은 물을수록 더 분명하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한 것, 그는 오직 예수님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철저한 저자세, 한 두 마디한정도가 아니다. “나는 소리로라”(23절). “나는 물로 침례(세례)를 베풀거니와”(26절), “나는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7절), “내가 전에 말하길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30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31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33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34절), 그는 연쇄적 강조법으로 계속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I am nothing), 자기 위치를 명백히 표명했다. 한 마디로 주제 파악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래서 자기 스스로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고 있을 뿐이라고, 자기 스스로는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릇 같은 존재다. 쓰레기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담으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보물단지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창1:27). 가치를 알아야 한다. 장갑은 손에 낄 때 의미가 있지 손에 끼지 않다면 의미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쓰임 받을 때만 존재가치가 빛난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고후4:7).

혹시 아직도 세상의 잣대로 자기 스스로를 재고 있나? 또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며 세상의 노예(Bond-servant)처럼 살고 있나?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의 시작 때 항상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종이 되겠다는 사람(출21:5-6)인 셈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본능적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원한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자랑하고 싶은 열정에 사로잡혔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행복했던 모양이다. 예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이 너무 좋았고, 그 분의 종이라는 사실이 너무 좋아 스스로 귀를 뚫었다. 자발적 종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침례(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여겼다. 메시지 때문이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라 하면 로마 식민 정부로부터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바로 그 사람! 그래서 요한은 조사단의 의도를 알기에 당신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I am not the Christ!) 딱 잘라 말했다.

그는 엘리야도 아니라고 했다. 말라기에 엘리야를 메시아보다 앞서서 보낸다(말4:5)고 했기에 조사단이 메시아가 아니면 엘리야냐 물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죽음을 겪지 않고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때가 되면 다시 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아니란다. 이 대답은 사실 좀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침례(세례) 요한을 장차 오리라고 한 엘리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11:14, 눅1:15-17). 왜 아니라고 했을까? 요한은 그저 자기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려 한 것이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래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예수님만 높인다.

조사단은 또 묻는다. “그럼 네가 그 선지자냐?”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온갖 종류의 선지자가 오리라고 기대했다(마16:14, 막6:15, 눅9:16). 구체적으로 신18:15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그 선지자의 출현을 예상한 것이다. 요한은 여전히 “아니라”고 딱 자른다. 내 사명은 ‘여기까지’ 명확히 선을 긋는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요한은 냉담하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 오직 예수님께만 초점이 모아지기를 소원할 뿐이었다.

생명의 소리다

돌아가 보고할 수 있는 긍정적 언질을 전혀 받지 못한 조사단은 “그러면 어찌하여 침례(세례)를 베푸느냐” 물었다. ‘무슨 자격으로?’ 그런 얘기다. 요한은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하며 대답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23절) 헬라어 원문은 I am the voice 형식, 광야의 설교자에게는 무슨 모양으로나 탁월함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자기를 ‘소리’라고 했다.

형체가 없는 소리, 소리는 공기의 울림이다. 초당 340m/s의 속도로 움직인다. 단순한 파장일 뿐인데 이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소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말도 소리, 우리는 말, 즉 소리로 사랑을 고백한다. 또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말, 즉 소리로 듣는다. 소리는 자신이 주목을 받는 게 아니다. 단지 전달할 뿐이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입니다,’ 할 때 우리는 소리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가리키는 그 사람, 그리스도를 주목한다. 소리는 메시지를 전달한 후에 사라지고 없어지는 존재에 불과하다.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소리’, 침례(세례) 요한의 진면목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킨 것이다. 주의 오심이 임박했으니 준비하라고 초대하는 것, 요한은 밀려오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만날 준비를 시켜야 했다. 하지만 ‘광야의 소리’? 광야는 도시가 아니다. 사람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광야로, 요단강으로 몰려든다. 요한은 기꺼이 주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소리가 된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 소리에 생명이 있고, 그 소리에 진실이 있고, 그 소리에 희망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소리를 들으며 산다. 핸드폰 벨소리, TV 소리, 차 소리, 아이 우는 소리... 공해다. 소음만 가득하고 생명의 소리는 없다. 그런데도 이런 소리가 차단되면 불안해한다. 정작 들어야 할 소리는 듣지 못하면서... 영의 소리, 영혼의 소리가 들려야 한다. 그 소리가 들려야 우리 생명이 산다.

침례(세례) 요한의 말에는 생명이 있다. 왜? 예수, 생명이신 예수님을 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소리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든 것이다. 마치 80년대에 강원도 태백 예수원에 대천덕 신부가 계실 때 사람들이 그 깊은 산골짜기까지 몰려들었던 것과 같다. 대천덕 신부의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라는 책이 영성에 목말라하던 당시 청년들에게 영의 양식을 준 것과 비슷하다. 어눌하지만 사랑과 진실이 담긴 그의 한국말, 그 소리에 생명이 있었고 그 소리에 영적 만족이 있었다.

생명 없는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생명의 소리를 사모해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삶을 살기 바란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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