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신문사 편집인 윌리엄 헐스트(William R. Hearst)는 돈을 모으는 대로 취미로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다 재미가 들어 아예 수집광이 되었다.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생의 목적인 양 진귀한 미술품이 있다면 전 세계 어디라도 달려가 사들여 많은 귀중품을 소장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럽 왕가에서 사용했던 도자기 하나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잡지에서 그 그림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탐이 났다. 하지만 혼이 나간 사람처럼 사겠다는 일념으로 유럽을 여러 번 가서 샅샅이 추적했지만 그 도자기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실망도 컸다.

그런데 어느 날 잡지를 보다가 그 도자기는 벌써 언론인 출신의 미국의 어떤 사업가가 오래 전에 사갔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깜짝 놀라 그를 찾아 미국 전역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람을 알아냈다. 충격이다. 그는 바로 자신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자기가 갖고 있었던 것, 가치를 몰라 그 귀한 것을 광속에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 얘기가 아니다. 엄청난 가치의 도자기를 자기 집 광 속에 두고도 그 보물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고 그것을 찾아 헤매는 어처구니없는 사람이 바로 우리일 수 있다.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께서 최고의 보물이신데 그분의 가치를 잊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며, 심지어 헛살았다고 푸념까지 하며 산다. 어이없지 않나? 예수께서 최고의 보물이신데...

요한복음에 ‘독생자’(μονογενης)라는 표현이 두 번째 등장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 성육신을 말씀하실 때에 이어 본문 18절에도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 표현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여기 17절이 처음이다. 복음서 전체를 겨냥한 서언, 라이트풋(R.H. Lightfoot)이 “복음서 전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고, 브라운(R.E. Brown)이 “초기 기독교의 찬송과 같다”고 한 서시(prologue)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의미를 생각하며 은혜를 누린다.

능가하시는 분

요한복음의 신학적 주제 중 하나는 예수께서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한복음은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과 같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절). 율법이 은혜‧진리와 대비되고,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가 대비된다. 물론 이 둘이 적대적이거나 반대 개념은 아니다. 율법을 능가하고 대치하는 은혜와 진리가 임했다는 뜻이고, 예수님이 모세를 능가하고 대치하는 분으로 오셨다는 뜻이다.

마치 메시아처럼 출애굽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던 모세가 지금까지 촛불을 들었던 분이라면 이제는 예수님이 태양 빛을 드셨다는 것이다. 촛불도 의미가 있고, 태양도 의미가 있지만 촛불 때문에 태양을 외면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물론 촛불도 한때는 밝은 빛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드 잡을 때나 냄새 제거용 정도로 쓰일 뿐, 밝게 할 목적으로는 아니다. 지금은 더 참된 것,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예상외로 촛불을 고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이건 익숙한 것이 좋다는 삶의 태도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그런데 그거 아나? 가만히 있으면 떠내려가는 것, 자전거의 경우는 가만히 있으면 넘어진다. 우리 사는 세상은 죄악의 물결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 틈만 나면 넘어뜨리려 하며 끊임없이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살려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기억하라. 어제 옳았던 것이 오늘도 옳다는 법이 없다. 아니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시대를 고집하면 안 된다. 아직도 율법만 붙들고 산다면 그건 영적 소경이고, 죽은 것과 다름없다. 예수님이 성취자, 능가자, 대치자로 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로께 집중하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율법, 한때는 빛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셨지만 그 과정을 보면 모세는 예수님과 대비된다. 요한은 예수님을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지만 모세는 율법을 받을 때 품속은커녕 그저 멀리서 보고 본 뜬 것을 들고 온 정도, 하나님의 등만 보았을 뿐이다(출33:20-23). 이게 모세의 한계다. 아니 인간의 한계다.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뵈면 죽는다고 했다. 율법도 한계 면에서는 마찬가지다. 한계 속에서 받은 율법이라면 그 율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라고 선을 그었다.

율법을 폄훼하거나 모세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받은 율법도 대단하다. 모세도 엄청났다. 하나님의 등만 보고 내려왔어도 눈이 부셔서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 앞에 설 때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등만 살짝 봤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 했다. 모세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능가자이시다. 오랜 세월 이스라엘을 지탱케 하고, 인도하기도 했던 율법이 갑자기 초라한 빛이 되고 말았다. 이게 율법이 약화된 것일까? 그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너무 찬란한 빛이 임하셨기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빛이었기에 그 밝기 앞에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것, 태양이 없을 때는 밝은 빛, 훌륭한 빛이었지만 이제는 촛불 같은 율법 시대는 지났다. 능가하고 대치하는 태양 빛이 비치는 새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나타내신 분

성경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했다(18절). 구약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 감추어진 분이셨다. 이게 바로 성경적 신관의 첫 출발점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 하나님은 초월해 계셔야만 구원이 가능하다. 우리와 같은 존재라면 어떻게 구원이 가능하겠나? 또 만일 이성으로 파악되는 존재라면 이성보다 작은 존재가 되는 것, 이성보다도 더 작은 존재라면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한 번씩 하나님이 스스로 보이기로, 계시(revelation)하기로 결정하신다. 주로 선지자에게 보이셨는데 그때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직접 대했다는 표현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모세를 염두에 두고 한 말, 모세마저도 하나님의 등 정도만 봤으니 봤다고 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시다는 것, 예수님은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계시의 제1 원칙이 ‘계시자는 계시되는 자와 같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만 계시되는데 예수님이 아버지 품속에 계셨던 하나님이라는 말씀, 그런 분이 세상에 나타나셨다. 진짜가 오신 거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양 빛이시라는 거다.

사실 우리는 너무 밝으면 제대로 볼 수 없다. 태양도 멀리서 보아야 볼 수 있지 가까이에서는 아예 볼 수 없다. 그렇게 멀리서 보거나 가까이에서는 볼 수 없다면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나?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품속에 계셨던 분,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그리고 자세히 아시는 유일한 분이다. 또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적격자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기에 하나님의 생각도 알고, 계획도 알고, 깊은 속마음까지 아신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자’,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표현했다. 헬라어로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ης), 독특성을 지닌 유일한 자녀라는 뜻으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상속자’, 다른 하나는 ’아들‘이라는 거다. 아들의 특징은 ‘순종’이다. 요한은 그 독생자가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다고 했다. 여기서 ‘아버지 품속’은 긴밀한 사랑의 관계를 뜻한다. 결국 이 18절의 표현은 에수님이 계시자로는 가장 적합한 존재라는 뜻, 요한복음 서시의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요한복음의 클라이맥스가 의심 많던 제자 도마의 신앙고백(20:28)이라면 서시의 클라이맥스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선언이다(18절). 요한복음의 결론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란 것인데 서시의 결론도 요한복음의 결론, 절정 부분과 상응한다는 말이다.

‘상속자’가 아버지의 본질에 동참한다는 의미라면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관계, 이는 계시자가 아들이라서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아시는 분, 하나냐 둘이냐가 아니다. 유일한 아들, ‘독생자’이시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배타적일 정도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진리이고(the Truth),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the Way)고 말씀한다. 그리스도만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18절의 ‘나타내셨다’는 단어는 영어로 explain, ‘설명하셨다’는 의미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사랑이시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자비가 무궁무진하신 분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구약에서의 사랑이 글로 배우는 사랑이었다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사랑은 실제로 하는 사랑이다. 이건 다르다. 말로 듣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나? 쓴맛과 단맛을 다 경험하고, 간절함과 무력함을 실제로 경험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이게 사랑이네’ 그러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손에 들려 누굴 보내는 것과 당신이 직접 달려오는 것은 다르다. 사랑한다고 백번, 천번을 말하는 것과 죄를 대신 짊어지고 직접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어찌 같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당신의 몸으로 직접 나타내셨다.

이유는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실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겠나?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해주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이 자녀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아버지라 불러도 된다고 온 몸으로 설명하셨다.

문제는 우리가 땅의 세계, 혈과 육에만 얽매여 영의 세계, 그 위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거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떡을 주기 원하시는데 우리는 고깃덩어리만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가 필요한데 땅의 우물에만 집착한다. 편견과 욕망과 무지로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보고 헤아리는 것처럼 큰소리친다.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고백했다. 혈과 육을 입은 인간 안에서 하나님을 본 자의 고백이다. 사람들은 성인의 모습을, 정치적 메시야의 모습을, 그저 초인의 모습을 보지만 요한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본다.

은혜와 진리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연달아 고백한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절),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절)

바울이 ‘은혜와 평강’을 세트메뉴처럼 연발했다면 요한은 바울만큼은 아니지만 ‘은혜와 진리’를 연발했다. 요한은 은혜보다 진리를 더 강조했다고 했다. 단어 사용횟수도 은혜는 4번, 진리는 25번, 진리는 헬라어로 알레세이아(άληθεία), ‘감추어지지 않았다’, ‘드러났다’는 의미다. 캄캄한 밤중에 꺼져 있던 형광등과 같았는데 스위치를 켜는 순간 환하게 빛이 났다. 진리이신 예수님, 빵과 물과 인간들 속에서 꺼진 전원을 연결시켜 빛을 비추신다. 날카로움과 명료함을 지닌 진리,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그림자 세계에 매여 있던 사람이 바깥의 빛의 세계를 본 것처럼 진리는 차원이 다른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요한이 ‘진리’보다 ‘은혜’라는 단어를 먼저 배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실이 드러나고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아프고 성가셔서 그럴까? 요한은 따뜻하고 위로가 되고 생명이 되는 단어, 희망을 가져다주는 은혜를 앞세웠다. 진리가 칼이라면 은혜는 칼집 같은 것, 칼집이 없는 칼은 적도 베지만 자신도 벨 수 있기 때문이다.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게 중요하다. 삼중고를 겪었던 장애우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말하지 못하는 상태로 평생을 살았지만 평생 농아와 맹인을 돕고, 인권운동과 노동운동에 크게 기여해 대통령 훈장도 받았고, 심지어 『나의 삶』, 『헬렌 켈러의 비망록』 등 많은 저술까지 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어떤 기자가 “육체적 고통과 함께 한 평생을 사셨는데 하나님을 원망해 본 적 없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빙그레 웃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없는데,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원망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감사하고 그 은혜를 기뻐하는 것으로도 시간이 부족해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요한이 은혜를 진리와 세트 메뉴처럼 소개한 것은 독특하면서 탁월하다. 비록 은혜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서는 여기가 끝이지만 은혜는 요한복음 안에 진리와 늘 함께 있다. 은혜와 진리의 균형이 중요하다. 은혜만 있으면 윤리가 없고 방만할 수 있고, 진리만 있으면 분열과 심판의 연기만 자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혜와 진리,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다. 그 은혜와 진리가 우리에게 승리와 행복의 양 날개가 되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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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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