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3. 믿음으로 사는 것이란?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이제 믿음에 관한 필요하고 유효한 기초를 쌓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삶이 다양하듯이 이 부분에는 마치 정답이 없어 보입니다. 태어난 사람의 얼굴이 다 다르고, 삶도 다 다르고, 처한 환경도 다르고, 받은 기질과 성격과 체질들이 다 다릅니다. 그러니 믿음의 삶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알아서 잘 살아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관심도 없고 사랑도 없는 것이겠지요. 오늘 저는 주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 한 편을 소개하면서 은혜를 같이 나눌까 합니다. 이 설교는 1881년 7월 17일, 주일에 메트로폴리탄 장막교회(Tabernacle Church)에서 행한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세 종류의 믿음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행복하며, 가장 즐거운 삶의 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 바닷가에 가면 우리는 바위에 붙은 조개를 볼 수 있습니다. 바위 위를 살금살금 걸어가다가 막대기로 힘껏 내리치면 조개는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조개를 내려치는 소리를 옆의 조개가 들었다고 합시다. 그때 옆의 조개는 있는 힘을 다해 바위에 매달립니다. 여러분은 그 조개를 힘으로 떼어내지 못합니다. 치고 또 쳐 보세요. 막대기만 부서집니다. 조그만 조개는 아는 것은 많지 않지만 그러나 매달립니다. 자기가 매달린 바위에 대해, 지질학적인 성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조개는 자신이 어디에 매달려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조개는 구원의 바위에 매달림으로써 자신의 지식을 사용합니다. 매달림으로써 조개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매달리는 성향을 주십니다. 완두콩을 보세요. 마당에 자라는 완두콩 줄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면 줄기를 들어 시렁, 즉 줄기 막대기 위에 올리거나 붙들어 매 보십시오. 줄기가 이내 시렁을 붙듭니다. 완두콩은 무엇이든 붙잡는 덩굴손이 있습니다. 또 완두콩은 아래로 자라지 않고 위로 자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모두 하나님을 향한 덩굴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식과 생각과 소망이 있어서 그것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종류의 믿음이지만 사실 이것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지금이라도 더욱 굳세게 하나님을 붙잡으세요. 성령께서 여러분의 손에 힘이 빠지지 않도록 견인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의 별명을 붙인다면 ‘죽기살기식 믿음’입니다. 단점이라면 때와 장소와 관계없이 떼를 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소신과 신념으로 행하는 것과 무지와 고집으로 행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 또 다른 형태의 믿음의 삶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그를 의지하고 따릅니다. 조개와 완두콩은 자신이 의지하는 대상에 대해 한 가지 사실만 믿고 의지하지만 이번의 믿음은 좀 더 많은 지식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가령,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내자를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소곤소곤 잠을 잘 자는 것은 본능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보금자리라는 것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 해도 선천적으로 그는 시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시각을 가지고 앞을 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자신의 손을 안내자의 손에 맡기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릅니다. (물론 여기서 안내견의 역할을 꺼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개가 훈련을 잘 받고 능력을 발휘한다 해도 앞에서 오는 김씨 아저씨를 알아보고 ‘안녕하세요 아저씨’하고 인사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믿음의 삶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잘 따른 인생입니다. 순종하는 인생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좋아서 자신을 예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기뻐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당을 닦고 쓸고 다듬고 정리하고 소박하지만 아름답게 꾸미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순수한 믿음’입니다.

한편으로 이런 믿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전한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권위에 복종합니다.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권위와 가르침을 존중하고 잘 따릅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스승으로 삼고 배우는 학생들이자 제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순전한 믿음은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배우는 학생은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문제는 지나치게 분별함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번개가 치니까 엄마는 아이에게 얼른 들어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이는 번개가 아름답다며 하나님께서 하늘에 만드시는 그 빛을 보고 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엄마가 천둥소리를 듣고 무섭지 않느냐고 물으니 아이는 하나님이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고 우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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