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2:2)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4)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1. 구원의 서정에 대한 소회

이번부터 지난 번에 배웠던 소위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즉, 구원의 순서에 대해 하나씩 알아봅니다. 물론 이러한 순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에서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보다는 구원의 모든 축복이 주어지는 기초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였습니다. 화란의 개혁신학자인 벌카우어 같은 이는 성경에는 구원의 서정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구원의 단계들로서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반대합니다. 예를 들어 믿음 같은 요소는 어느 한 지점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칭의, 성화, 견인 등과 같은 모든 신자의 삶의 과정 전반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초점은 무엇인가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개개인들의 경험 속에서 어떠한 순서로 파악되느냐 보다 그러한 요소들로 구성된 구원의 풍요로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구원의 모든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로 연합된 것을 오히려 갈라놓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에 대한 학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기초적인 지식을 배양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효력을 발휘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서너 달, 혹은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 풍요로운 구원의 전 과정을 학습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면서 이 모든 일에 성령님의 개입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함께 하실 것을 바라고 믿는 바입니다.

2. 부르심

오늘은 제일 먼저 등장하는 ‘부르심’을 학습합니다. 부르심을 신학 용어로는 ‘소명’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뜻입니다. 영어로는 Calling이고 헬라어로는 ‘크레시스’입니다. 이 단어는 동사 ‘칼레오’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무엇무엇을 밖으로 불러내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세상으로 불러내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은 아무튼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인정하든 아니하든 좋지 않은 상태에 처한 나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어 좋은 상태로 바꾸어 놓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르심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서 당신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 쉽게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믿음으로 고백하고 선포합니다. 즉,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동의어입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 1:6)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굣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2~3)

교회 앞에 살면서, 매일 교인들을 만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고향에서 아버지가 가업으로 물려준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별 탈 없이 살아오면서 어느새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그는 교회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손님이 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코앞에 있는 교회당 건물 안으로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교인들과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매우 유쾌하고 친절합니다. 교회가 하는 행사에 찬조금도 아끼지 않고 내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의 찬조에는 다분히 음식점을 경영하기 위한 사업 목적이 깔려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과 교회는 상부상조하는 관계입니다. 서로 좋은 말로 인사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 믿으라는 말에는 한사코 손사래를 칩니다. 그런 말만 아니면 다 좋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음식점을 운영하는 것도 벅차 교회에 다닐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그는 교회 앞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의 아내는 다릅니다. 갑자기 아내가 교회에 나가겠다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이 여자가 머리가 돌았나?”하고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남편 말에 싹싹하게 순종하던 아내가 달라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네 알았어요”하고 물러날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내 뜻대로 할거예요”라고 항거를 하였습니다. 남편은 속으로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고 주일날 아침에 교회로 나서는 아내의 등짝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 가는 것을 막자니 이혼당하는 것이 두렵고, 그렇다고 방치하자니 일요일 식당 장사가 걱정입니다.

이렇게 지금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회심을 하고 교회에 나오는 광경을 지금도 우리는 목격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때가 이르자 예정 가운데 선택해 두었던 그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나라는 지금까지 몸담고 있었던 세상 나라와는 판이하게 다른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인간의 능력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높은 지위를 이용해 빽을 써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며 우연히 소 뒷걸음치다 요행이나 행운으로 들어가는 나라도 아니고 기발한 재주나 기술을 발휘하여 들어가는 나라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이기에 주님등록증을 발급해서 국민의 신분을 보장한다거나 여권이나 비자 같은 입국허가증을 발급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실제로 존재하며 영원히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오직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도 스스로 노력해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믿어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성령의 역사가 순서상 가장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계속)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