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ㅣ<예수와 사마리아 여인>ㅣ1655년경ㅣ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그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개역개정, 요한4:5-6)

예수와 제자들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지역으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유대와 갈릴리지역의 중간에는 사마리아를 거쳐야하는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여 먼 길로 우회하여 여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은 사마리아가 민족적, 종교적 순수성을 잃었다고 배척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 일행은 요단강을 건너 우회하지 않고 가까운 길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 길을 택했다.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성 앞에 왔을 때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기 위해 동네에 들어가고 예수는 동네 앞에 있는 우물가에 가서 쉬고 있었다. 이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긷기 위해 우물에 왔다. 예수는 그 여인과 대화를 시작했다. 이른바 '로기온'이라고 부르는 대회형식의 말씀전도 방식인 것이다.

예수가 우물가에서 여인과 만난 시간이 성경에는 "여섯 시 쯤 되었더라" 고 했다. 이 시간을 두고 우리나라의 여러 주해서와 강해에서는 여인의 행실과 관련시켜 이렁게 해석한다.

"여인이 예수가 있는 우물에 나온 시간이 유대시간으로 제 육시인데 우리의 시간으로 하면 낮 열두시이다. 이때는 햇볕이 가장 뜨거운 때여서 다니는 사람이 없다. 이 여인은 도덕적인 면에서 떳떳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신분이기 때문 에 남을 눈을 피해서 정오경에 우물에 왔다."(주1. 장성규 <요한복음 주해> 1992. 보이스사 pp.100-102)

그럴듯한 스토리로 설명을 하니까 그냥 그렇게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필자가 뉴욕에 근무할 적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유화작품인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 이란 작품 앞에서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은 환한 대낮이 아니라 어둠침침한 해질녘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미술관에서 발간한 <렘브란트와 성서, Rembrandt and the Bible>라는 책을 샀다. 이 책의 저자로서 47년간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일한 메이어(A. Hyatt Mayor)는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난 시간은 로마인들의 속담에서처럼 개와 늑대를 분간키 어려운 파장을 외치는 시장의 초저녁 시간이라고 해설하였다.(주2. A. Hyatt Mayor.  197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p.18)

어떻게 된 일일까?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ㅣ<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ㅣ1808년경ㅣTate collections

헬라어 원전이나 킹 제임스 번역본에서는 모두 '여섯시쯤'이다.

우리나라 성경도 오랫동안 '제 육시'(개역성경), '여섯시쯤(개역개정) 으로 돼있지만 난외주에서는 '열 두 시 경' 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다가 가톨릭과의 공동번역과 새 번역에서는 성경본문을 아예" 낮 열두시쯤'으로 쓰고 있다. 원전과는 다르게 어떻게 그렇게 번역한 것인지 의문이 있다.

왜 이렇게 시간에 대한 혼란이 있을까?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로마식 시간은 밤중기점으로 한밤중에 영시로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그러나 유대식은 새벽기점으로 우리의 아침 6시가 영시이다. 그래서 복음서의 제6시는 우리 시간으로는 12시가 된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학자들은 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마가·누가복음의 세 가지 공관복음은 유대식 시간으로 되어있지만 요한복음은 로마식 시간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예수와 여인이 만난시간은 저녁 6시로 렘브란트의 그림과 일치한다.

요한복음에서 시간을 표시한 기사가 4회 나오는데 그 중에서 '제6시'에 일어난 사건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예수가 수가성 여인을 만나는 시간이고 또 하나는 예수가 빌라도 총독 앞에서 재판받는 시간이다.

이 날은 유월절의 예배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한 19:14)

여기서도 유대식이라면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은 시간이 정오가 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의 수난시간과 틀리게 된다. 성경에 오류가 있단 말인가?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십자가 고난을 이렇게 분명히 쓰고 있다.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라 (마가15:33)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제3시로 로마 시간으로 아침 9시다(마가15:25). 그 후 12시로부터 온 땅이 어두워지고 오후 3시경에 운명하였다. 이런 과정은 성경에 명문으로 규정돼 있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책인 요한복음 원전의 '제6시'가 모두 12시쯤이라는 우리나라 성경번역은 이해하기 어렵다 원전대로 번역하고 해석을 달리할 수는 있겠다.

요한복음의 시간은 로마식으로 빌라도 총독 앞의 재판은 정오가 아니라 새벽 6시이며, 예수가 수가성 여인을 만난 시간은 오후 6시이다. 그래야 성경 전체 시간이 충돌하지 않고 오류가 없는 성경이 된다.

미국의 새 국제표준번역(NIV)에서는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나 빌라도의 재판 모두 '제6시쯤'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권위 있는 신학자들이 공동집필하여 신뢰할만한 성경해석으로 정평이 난 NIV 스터디 바이블에 의하면 '제6시쯤'에 대한 신학자들의 논란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ㅣ<빌라도 앞의 그리스도, Christ before Pilate>ㅣ1520년경ㅣ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즉 빌라도 재판은 12시라고 해석하는 입장도 있고, 마가는 제3시(로마시간 9시)에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였는데 그리스 원전의 6자와 3자는 혼동하기 쉬워서 성경 필사자가 6자를 3자로 잘못 표기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로마식 시간을 사용한 듯하다. 이 경우에는 빌라도 앞의 재판은 아침 6시가 된다.(주3. The NIV Study Bible. 10th Anniversary Edition. 1995 , p.1631)

예수의 역사적인 수가성 여인과의 만난 시간은 우리나라에서는 우여곡절을 겪어왔지만 렘브란트 그림이나 NIV 해석과 같이 정오경이 아니라 어둠이 깃든 저녁 6시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인 귀결이라 하겠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이 글을 쓰면서 복음성가의 한 구절이 가슴 속을 맴돌고 있다.

강정훈 교수는…

강정훈 교수는 1969년 제7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해 뉴욕 총영사관 영사(1985~1989)를 거쳐 조달청 외자국장, 조달청 차장(1994~1997) 등을 지내고 1997~1999년까지 조달청장으로 일했다.

행정학박사(연세대·서울대 행정대학원·성균관대학원)로 성균관대학교 행정대학원 겸임교수(2004~2005), 2003년부터 현재까지는 신성대학교 초빙교수를 맡고 있다. 또 (사)세계기업경영개발원 회장(2003~2008)을 역임하기도 했다.

강 교수는 1992년 성서화전시회를 개최했으며 1994년에는 기독교잡지 '새가정'에 1년 2개월간 성서화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했다.

현재 자신의 블로그 '영천의 성서화 라이브러리(http://blog.naver.com/yanghwajin)'를 통해 다양한 성서화와 이어 얽힌 뒷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35년간 중세의 성서화 자료와 한국학 및 한국 근대 초기 해외선교사의 저서를 모으고 있다. 그 중 한국학 및 한국 근대 초기 해외선교사 저서 및 자료 675점은 숭실대 학국기독교박물관에 2011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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