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 3:19~20a)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전 6:15. 19~20)

1. 인류 최고의 연구 대상

영국의 시인 중 알렉산더 포프(A. Pope, 1688~1744)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의 풍자시 <우인열전>과 철학시 <인간론>은 대표적인 영국 문학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세상이 잊혀짐으로 인해 세상은 잊혀진다”는 그의 명언이 재 거론되어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생전에 “인류 최고의 연구 대상은 바로 사람”이라고 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의 이런 생각이 성경적이라거나 특출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시인이자 철학가가 자기 시대를 살면서 인간에 대해 이 정도까지 진지한 고찰을 했다는 그 자체를 의미 있는 일이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포프가 아니라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신비로움에 대해 여전히 궁금해 합니다. 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무엇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등등의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고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은 대답은 단 하나입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하고자 한다면 성경 안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적 계시를 떠나서는 인간의 차원에서 이 질문들에 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 답을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것은 오직 단편적일 뿐이어서 항상 일그러진 그림만 그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동의한다면 모든 자연주의자, 그가 철학자이든 과학자이든 인문학자이든 문학자이든 예술가이든 상관없이 인간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파편적이고 모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물학자들은 사람은 본질상 동물이라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람은 동물이 아닙니다. 칼 막스(K. Marx, 1818~1883)같은 이는 사람의 본질은 그가 하는 노동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노동을 중심으로 노동을 생산하는 계층을 생산계급으로 부르고 노동을 통해 이익을 누리는 계층을 소위 부르조아라고 하는 착취계급이라 불러 결국 계급투쟁의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또 실존주의자들은 사람의 독특성은 그가 가진 의지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과학 숭배주의자들은 사람은 그저 가장 정교한 컴퓨터라고 말합니다. ‘라인홀드 니버’라는 신학자는 이 문제를 두고 “매우 귀찮고 골치 아픈 문제”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인간의 문제가 그렇게 골치 아픈 문제입니까? 정말 사람이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지 알 길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해결됩니다. 성경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성경을 다 읽지 않아도 창세기 3장까지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 소개한 본문들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2. 창 2:7

먼저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는데 무엇으로 지었느냐 하면 흙으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흙의 영광’이라고 붙였습니다. 사실 이 말은 보이스 목사의 창세기 강해 책에 나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여러분에게 소개하면서 필요한 최소한의 신학적 입장을 덧붙일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논하고자 합니다.

첫째,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선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이 구절은 간단한 진술이지만 매우 심오한 진술입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겨우 한 줌 흙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이 진술은 어쩌면 가장 당혹스러운 진술일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존재가 가장 천하고 가치 없는 물질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만약 매우 귀한 보물을 소지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보물이 가장 값이 나가지 않는 돌멩이 같은 재료라면 과연 그 보물이 보물로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겠습니까?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지었을까요? 이를 알려면 성경에 등장하는 흙의 이미지에 대해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1) 흙은 가장 낮거나 천한 태생과 같은 하찮은 가치의 상징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니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18:27~28)고 말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달라는 간청을 들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신다”(삼상 2:8)고 노래했습니다.

2) 흙은 적으로부터 완전한 패배를 상징합니다.

여호아하스 왕 시절에 아람 왕이 쳐들어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절했는데 성경은 이것을 두고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였다”(왕하 13:7)고 표현하였습니다.

3) 흙은 슬픔의 표현이었습니다.

욥은 비참한 처지 속에서 인간의 하찮음을 깨닫고 슬퍼하며 무려 스무 번 이상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4) 흙은 좌절의 상징입니다.

범죄 이후 하나님은 사탄에 대해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 것”이라 저주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문자 그대로 흙을 먹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뱀의 입안에 있는 흙은 패배와 굴욕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죄를 범하도록 유도한 사탄의 악행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며 사탄의 영원한 패배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버젓이 악행을 행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영원토록 흙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사 65:25)

이로 인해 사탄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좌절감을 가지고 희망 없는 세월을 보내야 합니다. 사람의 인생에도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것은 희망이 사라졌을 때일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고문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탄이 한입 가득 가장 쓴 흙을 맛본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때였을 것입니다. 사탄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승리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완전한 승리이면서 동시에 사탄의 결정적인 패배입니다.

(이 광경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신문의 만평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의 ‘star’지에 게재되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롬멜 전차사단은 승승장구했습니다. 드디어 이집트까지 집어삼키려 했는데 그때 러시아군대가 전쟁에 참여하자 독일은 북부지역의 방위가 급해졌습니다. 이때를 틈타 영국의 몽고메리 휘하 전차부대가 일순간에 이집트에 진출하여 독일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 장면을 두고 신문의 만평은 히틀러가 해골 더미 위에 발끝으로 서서 ‘VICTORY’라는 모양의 구름을 손가락으로 잡으려고 공중에 팔을 뻗치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 만평의 표제는 ‘그것은 항상 아슬아슬하게 잡히지 않는다.’였습니다.)

사탄의 신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의 승리는 손에 잡힐 듯이 다가왔지만 결코 그는 승리의 옷자락을 손에 붙잡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이 아니면 계속해서 어긋나고 부딪치고 곤란한 환경이 발생합니다. 결국 고통의 길입니다. 이럴 때 빨리 깨닫는 것이 복입니다. 빨리 깨달아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요 유일한 살 수 있는 길입니다.

5) 흙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아담은 범죄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창 3:19)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선고입니다. 욥도 자신의 죽음을 두고 “흙에 누울 것”(욥 7:21)이라 고백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흙을 두고 죽음의 진토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 22:15)

이상에서 성경에서 흙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흙의 이미지가 점점 점증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흙의 쓴맛에서 슬픔과 불행과 저주가 담겨 있습니다. 이 저주는 영원토록 이어진다는 점에서 절망과 좌절로 이어집니다. 사탄은 이 절망과 좌절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데 그는 결국 패배하고 영원한 죽음을 선고받습니다. 사탄에게 선고된 죽음과 심판은 슬픔에서 출발하여 영원한 고통과 좌절로 발전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 법칙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실수하고 범죄 하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자신의 실수를 반복하거나 같은 죄를 반복해서 번하거나 더 큰 죄를 범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과 판단 착오와 실수와 허물과 죄악을 깨달았을 때 즉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계속)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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