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미국에 유학을 가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매일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부르는데 본인이 아는 찬송이 한 장도 없는 것입니다. 그가 아는 찬송 대부분이 거의 미국 곡인데 말이죠. 하도 궁금해서 룸메이트에게 물었습니다. “이 학교에선 내가 아는 찬송을 왜 한 장도 안 부르지?”라고요. 그랬더니 친구가 되물었습니다. “너희 한국에선 무슨 찬송을 부르는데?”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울어도 못 하네’ ...” 그는 껄껄대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건 찬송(hymn)이 아니고 복음가(gospel song)야.” 갑자기 헷갈리죠? 찬송가에 들어 있는 잘 아는 찬송들이 찬송이 아니라니요.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인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 말한 찬송의 정의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찬송이란 찬미하는 노래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인데 그중 한 가지만 빠져도 찬송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찬미’(Canticum), ‘노래’(Laudem), ‘하나님께 드려짐’(Dei)을 가리켜 흔히 ‘찬송의 3요소’라 일컫습니다.

“찬송이란 노래함으로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노래이다. 그러므로 다만 노래하는 것으로 그치고 그 노래 속에 하나님을 찬미하는 내용이 없으면 찬송가가 아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찬미하더라도 노래가 없으면 이것도 찬송가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찬송가라 불리려면 세 가지를 지녀야 한다. 즉 찬양하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리고 노래로 불리어야 한다.”(St. Augustine)

먼저 첫 번째 요소인 ‘찬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컨대 예배찬송인 ‘거룩 거룩 거룩’(8장)과 복음가인 ‘울어도 못하네’(544장)를 비교해 봅니다.

“1.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후렴]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당했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
2.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 하니 힘써도 못하네.
3.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4.믿으면 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울어도 못하네’의 가사에선 찬미의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혹 나타날까 하여 끝까지 불러 봐도 후렴에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라든지, “4절에서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로 끝났지, 감사하다든지 영광을 돌린다든지 하는 찬미의 내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거스틴의 찬송의 요소로 볼 때 ‘울어도 못하네’는 ‘찬송’(hymn)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룩 거룩 거룩’을 보십시오.

“1.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신 주님 성 삼위일체 우리 주로다.
2.거룩, 거룩, 거룩, 주의 보좌 앞에 모든 성도 면류관을 벗어드리네.
천군 천사 모두 주께 굴복하니 영원히 위에 계신 주로다.
3.거룩, 거룩, 거룩, 주의 빛난 영광 모든 죄인 눈 어두워 볼 수 없도다.
거룩하신 이가 주님밖에 없네. 온전히 전능하신 주로다.
4.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천지 만물 모두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성 삼위일체 우리 주로다.”

처음부터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라 하지 않습니까. 찬송은 찬양, 경배, 감사, 영광, 존귀 같은 드리는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찬송가는 예배 적입니다.

복음가(gospel song)는 예배 찬송과는 달리 주님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주님께 돌아오길 설득하는 노래이기에 십자가, 피, 용서, 부르심, 영접, 회개, 사죄, 구원 등이 주 내용이므로 복음적입니다.

미국에서 독립전쟁을 전후해 극도로 죄악이 극심하던 때에 때마침 매사추세츠 중심의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과 이후 서부 켄터키에서 대부흥운동(Great Revival)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부흥집회에서 부르게 된 새로운 장르의 노래들은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게 됩니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밋밋한 시편가를 불렀었거든요.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나 맥그리디(James McGready, c.1760-1817), 그리고 이후에 무디(Dwight L.Moody, 1837-1899) 같은 대부흥사들은 문학과 음악에 재능을 가진 동역자들을 모아들여 복음화 운동에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1830년경 미국에서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은 인구가 무려 미국 인구의 1/3가량이나 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미국 서부 개척의 대열마다 열리는 산야집회(camp meeting)는 복음가로 인해 엄청난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찬송가는 예배이고 가스펠 송은 복음입니다. 찬송가도 가스펠 송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 이 글은 필자가 진행하는 유튜브 ‘김명엽의 찬송교실’ 동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김명엽
김명엽 교회음악아카데미 원장 ©기독일보 DB ©기독일보 DB

김명엽 교수(교회음악아카데미 원장) 프로필>
연세대 교수, 추계예대 교수 역임
국립합창단 예술감독, 서울시합창단 단장 역임
한국지휘자협회 고문
제66회 서울시문화상 수상
현) 교회음악아카데미 원장
서울바하합창단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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