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장로교회 최승관 목사와 그의 목회자 팀. 4명 모두 1.5세대 들이다. 미국, 호주, 몽고, 뉴질랜드 등 살아온 환경도 다양하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장로교회 최승관 목사와 그의 목회자 팀. 4명 모두 1.5세대 들이다. 미국, 호주, 몽고, 뉴질랜드 등 살아온 환경도 다양하다. ©최승관 목사 SNS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설교하는 목회자도, 사실 연약한 사람이다. 그를 하나님께서 들어쓰실 뿐, 그도 쉽게 지치고, 넘어지고, 때론 고통스러워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 있다. 그럴 때 누군가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바울은 편지를 통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바른 신앙을 권면하면서,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자신에게 눈까지 빼어주리라 했던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을 다시금 회상시켜 그들을 다독거린다. 너희는 정말 나를 사랑해 줬던 소중한 사람들이라며.

최승관 목사(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장로교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목회 스트레스로 공황장애와 화병이 와 쓰러지기 직전, 그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설 수 있었다. 또 교회 성도들은 그를 걱정해 주고, 기도로 중보했다. 잠시 한국에 들어와 2개월 가량의 휴식을 마무리 하고 다시 사역지로 돌아가기 직전의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 목사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 혹은 체험을 하는 목회자들이 많을 것이라 보고,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좋겠다며 자신의 부족함을 용기 있게 털어놓았다. 다음의 그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Q. 안녕하십니까. 자신의 소개를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A.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담임목사인 최승관 목사입니다. 저는 40살까지 한국에서 14년간 목회를 하다가, 안식년으로 방문했던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라는 도시의 한인장로교회에 2000년도 2월에 부임했습니다. 뉴질랜드 현지교단인 뉴질랜드 장로교회 목사로 편목 과정을 밟아 현재 20년째 이민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왜 나를 이민목회자로 부르셨는가'를 몰랐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사역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는데, 목회자로 부름 받았을 때,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행13:47)라는 사명을 받았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원래 제 바램은 한국에서 교회를 부흥시켜 한국과 세계교회 앞에 이방의 빛이 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민목회자로 부름 받아서 사역을 하다 보니, 뉴질랜드에서 이방의 빛이 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대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또한 노동자 농민을 위해서 한번 살아보겠다고 결단, 100여 명도 안 사는 낙도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는데, 결국은 섬에서 시작한 사역을 섬에서 끝맺게 되었습니다.

Q. 뉴질랜드크라이스트 한인장로교회는 뉴질랜드 대표 교회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 소개도 부탁드립니다.

A. 뉴질랜드와 크라이스트치처지는 영국의 마지막 신민지로 개척된 가장 영국적인 나라이며 도시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내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 출신들이 180여 년 전에 도시를 세웠는데, 초기에는 98%가 교회에 출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4%도 안되는 무신론 국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복음이 2세대 이상 단절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우리 교회는 1988년에 개척한, 뉴질랜드에서 두 번째로 시작한 한인교회입니다. 뉴질랜드는 북섬과 남섬으로 나뉘어 있는데, 우리 교회는 남섬 제일 도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습니다. 제가 부임하기 전에 교회가 두 개로 나뉘어 졌다가, 2000년 1월에 다시 하나로 합치면서 4대 목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이민문이 열려서 2년 만에 200명에서 500명이 되고, 5년만에 800명이 되었습니다. 다운타운 바로 옆에 대지 3000평을 구입하여 본당을 건축했고, 교육관을 매입했습니다.

1000명 시대를 내다 보면서, 뉴질랜드 부흥과 전세계 디아스포라 이민교회들과 선교사들을 연결하는, 사람을 보내는 베이스 캠프 교회가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월드 미션 트레이닝 센터'가 되는 교회를 꿈 꾸었습니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장로교회 최승관 목사와
©최승관 목사 SNS

Q. 그런데 그간 어려움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부분인지 이야기 해주셔도 괜찮을까요.

A. 2010년 9월 10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지진대가 깨어나 진도 7.1의 지진이 뉴질랜드에 발생했습니다. 첫번째 지진이 일어났을 때 건물이 흔들리고 집들이 무너졌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6개월 후 다시 진도 6.7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번에는 가까운 앞 바다에서 지진이 발생해서 건물이 무너지고 184명이 사망했습니다. 도시 전체가 계속해서 흔들리는 지진으로 패닉(panic)에 빠졌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진도 6.0 이상의 지진이 2번 더 발생했고, 몸으로 느끼는 지진 2000여 번, 몸으로 느끼지 못하는 지진 2만 번 이상의 여진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지진의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심한 분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무너졌습니다. 때문에 교민들은 5000여 명에서 반으로 줄었습니다. 오히려 대륙에서 온갖 경험을 다 겪은 중국인들이 지진 이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예측하고 더 적극적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무너진 집들과 건물과 땅을 사들여서 돈을 벌었고, 인구수도 3배 가 넘는 3만명 이상으로 늘어났더군요.

현재 크라이스트처치는 다운타운의 건물들 90% 가까이를 허물고, 진도 9도 이상을 견뎌낼 수 있는 최첨단 건물로 건축했습니다. 예술적인 건물들로 가득한 최첨단 도시로, 명품 도시로 탈바꿈 했습니다. 지진은 사라졌고, 있어도 문제 없는 안전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10년 간의 지진을 견뎌내면서, 800명이 400명 대로 줄어들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육관을 건축회사에 임대로 내 놓아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다음 세대, 특히 1.5세대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차세대 지도자를 양육하는데 집중했습니다. 2명의 부목사님들 중에 한 명은 LA출신 1.5세대 지도자, 다른 한 명은 호주 1.5세대 출신을 청빙했습니다. 아주 어렵게 그 분들을 청빙했는데, 그 분들이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설교하는 목회로 다음 세대들을 양육했고, 그 결과 3살에 이민 온 뉴질랜드 1.8세 전도사와 3살에 몽골 선교사 가족으로 이민 갔던 전도사를 배출해 내기도 했습니다. 또 해 마다 지역 교회들과 연합해 1.5세대들을 위한 부흥집회를 20여 년 째 이어오고 있다. 7~8년 전부터는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소화하는 부흥집회를 개최하고, 뉴질랜드 전역과 여러 나라에 고립되어 있는 청년과 청소년들이 몰려오는 청년 청소년 집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지진 때문에 유학생 가족들이 돌아가서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이민자 자녀들을 집중적으로 양육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 지난 10년간 새로운 형태(이중언어 사용)의 신앙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도시 전체가 안전을 찾을 즈음, 올해 3월 호주에 사는 백인 한 명이 크라이스트처치 모스크 사원에 침입해 연발총으로 무참하게 무슬림 42명을 학살하는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테러의 공포는 지진 10년간의 트라우마를 뛰어넘는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공포에 시달리는 교인들을 돌보기 위해 전념을 다했습니다. 국가적인 차원의 신속한 대응으로 테러의 상처가 그런대로 빨리 아물었지만, 사람들의 내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정말 깊은 내상을 입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 저 개인에게도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주일날 예배를 인도하려고 강대상에 섰는데, 세상이 갑자기 정지되어 있는 듯한 현상을 느꼈습니다. 어질어질해서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겨우 예배를 인도했는데, 그 후 증상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날은 교회 앞에 설 수가 없어서 맨 뒤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여차 하면 뛰쳐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부목사들에게 사회를 맡기고 뒤에서 안절부절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여 뛰쳐 나가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면서 겨우 설교를 마쳤습니다.

2주간 증상은 더 악화 되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현기증이 심해졌으며, 무기력증에 빠지고, 일하기가 싫어지고, 감정이 없어진 것 같고, 감정조절이 안되고, 수면장애가 심각해 지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근육통이 심해지고, 갑자기 무언가에 확 해딩하고 싶은 충동이 찾아오고, 두통이 지속되고, 밤마다 2-3시간 밖에 잘 수 없고, 몸이 수축되어 들어가는 느낌이 오고, 복부에 심한 비만이 발생했습니다.

정신력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정신을 놓기 직전, 뉴질랜드 홈 닥터에게 찾아갔습니다. 공황장애(Panic disorder)와 화병 같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의사는 무조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최소한 2달 이상은 쉬어야 한다는 소견을 냈습니다.

기로에 서 있을 때, 무언가 폭발하기 직전, 용기를 내서 나의 증상을 선배들에게 글로 보냈습니다. 한 목회자는 “몸이 일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니, 6개월 안식년을 가지라”고 조언해 줬고, 다른 한 목회자는 “우울증이니 무조건 2달 쉬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서울씨티교회 조희서 목사는 “급하다. 하루라도 빨리 (그곳에서) 나와야 산다. 머뭇거리다가 폭발하면 평생 문제가 될 것”이라는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교회 장로들에게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장로들은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용기를 줬습니다. 밀린 휴가로 한 달, 병가로 한 달, 모두 두 달 휴가를 얻어 한국으로 나왔습니다.

일단 한국에 오자마자 먼저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는 “큰 병으로 가기 직전이다. 다행히 아직 약 먹을 단계는 아니다. 머리에 너무 많은 것들이 꽉 차 있고, 스트레스가 꽉 차 있으니, 비워내야 한다. 걸어라 걸으면서 비워내라”고 조언했습니다. 한의사는 “탈진이다. 치료약을 먹고, 소고기와 잎사귀 채소를 먹어야 하는 체질이다. 그리고 잘 먹고 하루에 2-3시간이상 걸어라. 악착같이 많이 걸을수록 빨리 회복된다”고 했습니다. 약사 역시 몸의 영양분을 제공해 주는 약들을 추천해 주며, 걸으라고 조언했습니다. 결론은 비워내라, 체질에 맞는 음식을 먹으라, 그리고 걸으라는 진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몸에 맞는 음식들을 섭취하며, 하루 평균 2만보 가까이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걸을 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니 조금 힘이 났습니다. 10일이 지나니 소화불량과 불면증이 사라졌습니다. 한 달을 걸으니 몸의 체질이 바뀌었습니다. 조금만 추워도 내복을 입어야 했는데, 지금은 몸에서 열이 납니다. 그렇게 육체가 돌아오니,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육체가 약해지면 면역력이 떨이지고, 뇌에 세라토닌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자꾸만 허무한 생각과 무력증에 빠진다고 하네요.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이 진짜인듯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최대한 잘 먹고, 악착같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육체가 돌아오니 정신이 돌아왔고, 다시 일할 의욕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을 피하던 태도도 바뀌어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그들에게 새 힘을 불어 넣어줄 정도까지 회복 되었습니다. 다행히 2달 만에 회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가족들은 그의 목회 든든한 버팀목이다. ©최승관 목사 SNS

Q. 2년 전 미국의 한 대형교회 자살방지 사역을 하는 목회자가 자살했죠. 목회자의 우울증 문제를 직접 겪어 본 당사자로써 그 일이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A. 내가 아파 보기 전에는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기도가 약하구나, 믿음이 약하네’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자, 그런 연약함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에너지가 0.001%라도 남아 있다면 돌아서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큰 병 되어 버립니다.

분명 한계선을 넘기 전에 회복되어야 합니다. 저는 마지막 단계까지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완전히 탈진된 사람들은 회복에 7-8년 혹은 평생을 고통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0.0001% 에너지가 남아 있을 때 용기를 내고 도움을 받은 덕분에, 두 달 만에 아쉬운대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쉬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지만, 복귀하기로 했습니다. 위기가 찾아온 후 40일이 지났을 때, 내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를 지나왔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죽다가 살아난 심정입니다. 지옥 문턱에까지 갔다 왔습니다.

맨탈 문제를 두고 지도자의 자격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제로 저에게도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 머뭇거렸다면, 2달 만에 회복할 기회를 놓쳤을 것입니다. 물론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면 당연히 (강단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을 두고 휴식을 취하고 치료하면 나을 수 있는 병이라면, 주변 사람들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공황장애나 화병은 빨리 휴식을 취하고 치료하면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복이 안되더라도 병든 목회자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아주고 기다려 주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런 곳이 진정한 교회가 아닐까요? 목회자가 성도를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병든 목회자를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그런 성숙한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그런 고통을 함께 할 때, 더 깊은 사랑과 함께하는 삶이 이루어 지리라 믿습니다.

Q.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 약물치료가 필요한 부분을 영적문제로 터부시하는 교회 분위기가 존재하죠.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A. 병은 숨기면 안 됩니다. 한계점에 이르렀다면, 공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작은 암 덩어리가 발견되면 바로 수술하지 않습니까. 정신적으로도 이상 증상이 발생하면 공개하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Q. 같은 문제로 힘들어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주시고 싶으신가요.

A. 저는 이제 제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이렇게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중요한 때 저를 보듬고 도와준 사람들 때문입니다. 내가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아낌없는 사랑으로 나를 안아 주었던 가족들과, 동료들, 교인들의 중보기도와 후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저를 살렸습니다.

Q. 이제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가실텐데, 복귀 소감은 어떠신가요.

A. 죽었다 살아난 느낌입니다. 새로운 의욕이 생기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 목회지에 부임하는 심정으로, 첫 목회지 낙도를 향하여 나아갔던 순수했던 그 때 그 마음 그 믿음 그 열정으로, 개척하는 심정으로 교회로 복귀합니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장로교회 최승관 목사와
©최승관 목사 SNS

Q. 그렇다면 목사님을 위해 걱정하고 기도했을 교회 성도들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시죠.

A. 목회자의 힘은 성도들의 격려와 응원에서 나옵니다. 내가 힘들어 지치고 넘어졌을 때, 아낌없는 응원과 중보기도와 실제적인 도움을 준 성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성도들이 나를 살렸습니다. 때론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나를 책망했던 성도들 덕분에 좀 더 세밀해지고,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좀 더 신중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연단 시키신 것이죠. 건강할 때는 몰랐는데, 아파 보니 아픈 사람들이 보입니다. 환자들이 보입니다. 제가 그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지도 보입니다. 공동체적인 접근 보다는, 개인적인 교감이 더 필요하다는 자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응원하는 성도분들로 저는 살았습니다. 그저 내 곁에 있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합니다.

Q. 뉴질랜드크라이스트 한인장로교회의 비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사역하고 싶으신지요.

A. 뉴질랜드는 한 때 인구 대비 전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내보냈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신론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뉴질랜드 선교가 급합니다. 뉴질랜드를 다시 부흥시킬 수 있는 차세대 영적 지도자를 배출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제1 과제입니다. 차세대 지도자 100명 양성을 목표로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고립되어 있는 이민교회와 선교사들을 돕고, 협력하고 지친 이들을 재충전하게 하는 베이스 캠프 교회 역할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모든 병든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고, 재충전 할 수 있는 힐링 터 역할을 하는 교회로 쓰임 받기를 꿈꿉니다.

Q.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신다면.

A. 20살에 부름 받아 40년을 달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데 뒤돌아 보니 헛점 투성이 입니다. 부족하기 그지 없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저 같은 사람은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평범합니다. 지력도, 영력도, 능력도, 인격도, 너무 평범합니다. 목회자는 좀 뛰어난 사람들이 해야 하는데, 완벽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데, 저는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포기하고 절망한 고통의 시간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절망하고 울부짖으며 기도할 때마다 "너는 내 종이다. 내가 너를 불렀다"라는 말씀으로 저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주깨서 주신 용기 때문에, 그 말씀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멋진 분입니다. 저 같은 사람을 들어 쓰시는 솜씨가 위대하십니다. 돌아보니, 저를 통해서 힘과 용기를 얻고 거듭난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 때문에 상처받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도 참 많았습니다. 순종하고 바르게 정직하게 살면 사랑 받고 존경만 받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붙잡아 주시지 않았으면 벌써 수 십, 수 백 번 그만 두었을 겁니다. "너는 내 종이다. 내가 너를 세웠다"는 응답 때문에, 그 말씀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포기하고 무너질 때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응원해 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최고의 밥상으로 40년째 응원해 주는 고마운 친구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 때문에 저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 때문에 지치고 힘들어서 울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옆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옆을 보니 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좋아해 주는 이들이 가득했습니다. 저를 반대하는 사람들 보다 저를 응원하는 이들이 더욱 많았습니다. 그들의 힘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살다 보면 결정적인 순간들이 다가 옵니다.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있을 때, 옆에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최고의 밥상으로 응원해 주는 그런 따뜻한 목회자로 살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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