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다문화센터 대표, 대림중국교포교회 이선규 목사
대림다문화센터 대표, 대림중국교포교회 이선규 목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나날이 발전하고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정신면에서는 오히려 뒤떨어지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도 새 마음 갖기 운동이나 바르게살기 등의 여러 조직과 단체가 있어 수많은 구호와 행사를 치르고 있지만 얼마만큼 의식이 개혁되어지고 있는가는 의문으로 남게 됩니다.

국민의 질서의식은 유감스럽게도 저 개발 후진국 수준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8세기계몽 주의자들은 인간을 무지에서 해방하면 새롭게 개조 할 수 있다고 믿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여전히 인간이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인 것은 교육만으로 인간개조가 불가능함을 입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민족 건설은 인간 건설에서 부터 출발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인생을 살만 한가치가 있도록 만들 수 있는가 수양이나 지식 권력 그 무엇으로 가능 하다고 보십니까?

즉 타락한 인생이 새로워지고 중생하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힘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신 곧 성령으로만 가능함을 말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예레미아 선지자는 이 사실을 간파하고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 진데 악이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고 스가랴 선지자는 “이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못하고 내 신으로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인생을 살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들 수 있는가?

우리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윗물이 더럽다 해도 아랫물이 맑을 수 있습니다.

전 미국의 상원으로 존경 받던 헤롤드 후즈는 삶에 살아갈 만한 가치를 부여 하는 것은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의 젊은 시절 술꾼이요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으로 살았다고 슬픈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수치와 절망 속에 자살하기로 결심 하고 자살 전에 하나님께 왜 자신이 자살 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폭풍 속에 길을 잃은 아이가 무엇에 한대 맞은 것처럼 갑자기 넘어졌는데, 그곳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품안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한 후, 그는 이렇게 주님께 약속 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그 후 그는 약속대로 그와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심한 실패와 상처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열어 드리기만 하면 이와 같은 깨달음을 통한 변화를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래전 어느 날 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주신 약속(새로운 살만한 가치 있는 삶에)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면 새 인간 의식 개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의 근본은 뭐니 뭐니 해도 정신입니다. 정신은 자아의 주인이요 인생의 뿌리이며 삶에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만사는 다 근본이 중요합니다. 모든 일은 먼저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고 해도 뿌리가 약하면 비바람에 쓰러지고 맙니다.

근본 확립이 바로 되면 길과 방법은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찍이 인간들의 마음의 개혁 의식의 개혁을 외쳤던 것입니다.

마음이 살아서 꿈틀 거리고 생기가 도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통한 깨달음이 올 때 소망이 있고 정신은 상록수처럼 싱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지나 칠 정도로 열을 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자 그대로 교육 왕국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를 써서 가르침으로서 자녀들이 얻는 것이 무엇 입니까? 그것은 지식입니다. 지식은 배움을 통해 얻습니다.

배울수록 지식이 늘어납니다. 물론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지식이 곧 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식만으로는 바르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경험이 없고 본문이 말하는 거듭남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지(無知)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무각(無覺)입니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사람도 부모님의 은혜를 깨달아 지성껏 효도하는 사람도 많고 사회에서 성실하게 모범을 보이는 분도 많이 보았습니다. 이게 깨달음입니다. 지식은 배움을 통해 얻지만 지혜는 깨달음을 통해 얻습니다.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많이 하면 성경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학교를 나오고 신학 박사라고 해도 거듭남의 체험이 없으면 그 인생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된 회개를 통한 거듭남의 경험이 없는 그 성경 지식은 교만하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들었던 니고데모는 거듭남의 중생의 진리를 깨닫지 못 했습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이성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가 깨달은 분들이었습니다.

모세도 애굽 왕의 장자로 사는 것 보다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택했다고 합니다. 시편 84편의 저자는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 보다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나음’을 깨달은 자이며, 바울 사도는 지식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참 구주이심을 몰랐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은 후에는 새사람이 되어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선포 하였습니다. 그는 자랑 할 것이 많은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터넷이나 유튜브 등을 통해 많은 지식들을 지겹기 까지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학교 에서도 많은 지식이 전달됩니다.

그러나 진리를 깊이 깨닫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만나기에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도 마지막 때에 믿는 자들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기독교는 타 종교에 비해 거듭남과 중생을 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을 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은 삭개오에게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노라”고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아노뎀 이란 희랍 원어에 ’처음부터 ‘다시’ 위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 할 때 내가 거듭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이켜 거듭나지 않고는 결코 하늘나라를 볼 수도 없고 돌아 갈 수도 없다”(요3:3)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나 자신이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고 중생 할 때 비로소 인격의 변화가 오고 자연히 생활에 변화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 하나가 변화되면 나로 인해 주변 환경이 밝아지고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비록 윗물은 더럽다 해도 나부터 거듭나고 중생한 삶을 살 때 아랫물이 맑을 수 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이 있는데 아랫물조차 더러워지면 그물은 썩어서 마실 수 없게 되고 마실 수 없는 물이 된다면 그 사회나 그 국가는 가는 희망이 없는 거 아닙니까?

지금까지 힌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을 깊이 깨닫고, 새로운 토대위에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리라 확신 합니다. 깨달음이 올 때 우리 한국교회 나아가 우리 민족도, 또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혼탁한 우리 사회는 맑아지고 정화 되리라고 믿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깊이 묵상이 되는 말씀입니다. 깨닫는 백성이 복이 있다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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