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은 9월의 독립운동가로 나월환 선생을 선정했다.   ©사진=국가보훈처

[기독일보 윤근일 기자] 독립기념관(관장 김능진)은 29일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나월환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나 선생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며 중국 일대에서 한중공동 항일운동의 유대강화에 기여한 인물이다. 또한 중국 일대서 한국 청년을 정예병사로 길러낸 광복군지대장이기도 하다

1912년 10월 14일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나 선생은 1924년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박열(朴烈)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1930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선생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은 뒤 중국 군관학교 교수와 중국군 헌병장교로 근무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적 능력을 키워갔다.

1939년 11월 11일 선생은 류저우 등지에서 활동하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들과 함께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였다.

중국에 흩어져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공작을 전개하고 잡지 '한국청년'을 발행하였으며, '아리랑' 등의 연극공연을 통하여 중국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한중공동항일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전해 왔다. 임정과 한국광복군 측에서는 전지공작대와의 연대, 나아가 흡수를 시도하였다. 선생은 모든 역량을 국군인 한국광복군에 결집시키기 위하여 한국광복군 합류를 결정하였다.

이로써 전지공작대는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고, 선생은 제5지대장 및 징모제5분처 주임위원직을 맡아 일본군 점령지역을 무대로 초모·선전·첩보·유격전을 전개하였고, 모집 한인청년들을 한국청년훈련반에 수용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한국광복군 편입과정 등에서의 갈등으로 인하여 선생은 1942년 3월 1일,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광복군의 주력부대로 성장해가던 제5지대는 구심점을 잃게 되었고, 한국광복군 전체가 커다란 동요를 겪게 되었다.

한편 독립기념관은 이같은 나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연다. 9월 1일부터 30일까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열리며 그의 사진 등 관련자료 16점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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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나월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