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와 이재철 목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박성민 기자

"철없이 선택한 것처럼 했지만, 수녀가 된지 반 세기가 지났다는 것에 내 스스로가 자축하게 된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창립 9주년을 기념해 이해인(69) 수녀를 초청, 이재철(66) 목사와의 대담을 100주년기념교회 홍보관에서 16일 저녁 진행했다. 이날 이해인 수녀는 긴장하면서도 시종일관 매우 들뜬 모습과 설레임 가득한 모습으로 두 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의 대담에 임했다.

이 수녀는 먼저 9주년에 이처럼 초대된 배경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 수녀는 지난 15일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100주년기념교회의 9주년을 위해 와달라는 이재철 목사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사님이 기차 표까지 사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9주년을 얘기하시면서 거절할 틈도 없이 '일정을 메모에 기록하시라'고 말해 휴가를 냈고 이렇게 오게 됐다"며 "'대담'이라는 것이 너무 떨린다. 격려해달라"고 했다.

대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며 이 목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저는 이제 '무대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출구로 나갈 때가 됐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은 선물이지만 '시간 낭비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며 "자기가 맡은 배역을 충실히 해야하는 무대 위의 배우 같은 것이 인생인 것 같다"고 답했다.

이어 이 목사는 "'순례자'라는 것은 이 세상을 본향으로 삼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본향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인생은 임시 숙소에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저에게 조금 위로가 됐다"며 "어렸을 때부터 저는 너무 조숙했다. 결혼도 해야 겠는데, 남편과 따로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힘들었다. 그렇다고 여러 사람과 한꺼번에 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저의 언니가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도피 같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라고 전했다.

이해인 수녀는 올 해 칠순을 맞았다. 1945년 생으로 그녀는 직접 한국 전쟁을 경험했다. 이 목사는 칠순을 맞으셨는데, 인생관이 변하는지 재차 물었다. "제가 시를 쓰면 사람들이 읽어보지도 않고 '이해인 수녀는 감성이 넘치고 아름답고 착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의 희노애락을 모를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 암 선고를 받게 됐다(이 수녀는 현재 암 투병 중이다). 한편으로는 너무 기쁜 거에요. '아, 나도 고통을 말할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잘 증거할 내가 됐다고 생각했다. 고통이 축복이 되게 해야 하는 것을 보여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좀 더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브람스, 모짜르트 등의 음악을 들으면서는 눈물을 흘렸지만, 암 선고를 받은 이후 자기 연민으로 눈물을 흘린적은 없다. "수녀님은 체면 때문에 못우는 거라고 누가 그랬다. 성당에 가서 십자가 앞에서 소리내며 울어보라고 누가 말했고, 진짜 갔다. 그러나 아무리 울려고 해도 울음이 나지 않았다. 쇼가 아니고 정말 그랬다. 나 스스로 '내가 수도 생활의 내공이 생긴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수녀는 수술 뒤, 나머지 여생은 파도와 같은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건강할 때는 쓰지 않았던 것을 많이 쓰는 저를 보며 '고통 속에 축복이 있다는 것이 틀리지 않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라며 "젋은 날에 느끼지 못했던 그런 것이다. 연륜을 체험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 수녀에게 '출구'란 어떤 것일까.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사망 선고로 알려진 '대장암' 선고를 받았던 그녀. 이것이 이 수녀가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제 개인의 인생에서 암에 걸리리라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죽는다는 것을 별로 생각 안했었다. 그런 입장이 되니까, 정말 죽음이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옆에 가까운 손님처럼 와 있었다. 저는 어려서 부터 죽음에 대해 묵상을 했다. 전 6살 때 전쟁의 체험을 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친숙하게 다가온 건 저의 존재의 뿌리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다. '어머니가 가신 저 세상에 나도 가게 되는 것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수녀님들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며 항상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책을 찾아서 읽기도 했다. '언젠가는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것을 생각하는 동시에 부차적인 것이 정리가 되면서 본질만 남게 된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스탠포드대학교에서의 연설에서 '죽음을 묵상하는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어 이 목사는 "수녀님, 믿음이 뭐죠?"라고 물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스무살에 결혼을 하셨는데, 예수님이 좋아서 세례를 받으셨다. 아이를 낳으셔서 유아 세례를 주셨다. 우리는 어렸을 때 선택의 여지없이 신앙을 선물로 받았다. 사실, 어렸을 때 주일 학교에 다닐 때는 귀찮을 때가 많았다. 벌 주는 하나님 얘기만 했다. 사랑, 자비, 기쁨의 하나님보다는 경직 돼 있는 것들에 물들어 살았다. '신앙을 커서 자기가 선택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모태 신앙이 저를 지켜줬다. 자연스럽게 믿음이 몸 안에 배어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됐다. 믿음이 선물이고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끝까지 안 믿는 분이 있지 않나. 조금 있으면 숨을 거둘텐데 안 믿는다는 사람을 보면, '믿음은 하나님이 준 선물이구나'라고 느낀다. 믿음은 선물이고, 가장 축복이며 호흡과 같다라고 생각이 든다."

"수녀님께서는 어머니로 인해 주님을 영접하셨다. 만약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란 질문에 "문제아가 됐겠죠"라고 답했다.

이 수녀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어렸을 때 타고르, 세익스피어 등 외국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었다. 외우는 시들 중, '산 넘어 저쪽에 행복이 있다고 말하네'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시가 있었다. '아, 행복은 가까이에 있나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수도 생활은 그 자체가 워낙 엄격했다. '행복하면 안 되나 보다'란 생각을 하고 살았다. 행복은 결과적으로 선을 맺어주는 열매와 같다"라며 "수도 생활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했을 때 오는 기쁨도 기쁨이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닮은 마음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줬을 때 오는 은은함, 기쁨 등이 행복이 아닐까 한다.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겠다는 것이, 병원에서 링겔 주사 없이 걸어가는 것도 너무 행복이다. 일상에서도 행복이 많다. 행복을 보물 찾기 하듯 찾으면 많이 있다"고 전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16일 창립 9주년을 기념해 이해인 수녀를 초청, 이재철 목사와 대담을 진행했다.   ©박성민 기자

이어 "수도원에 입회한지 올 해로 반 세기가 됐다. 깨달은 건, 내가 먼저 할 때 여기에서 성숙이 일어나는거지, 내 이기심이라던가, 먼저 바라는 모습은 절대 아닌 것 같다.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 분을 닮고자 하는 여정에서 오는 게 확실한 것 같다"라며 먼저 배려하는 마음에 대해 강조했다.

수 없이 많이 받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해인 수녀는 왜 수녀가 됐을까.

"허영심이 참 많았다. 이기심도 많고. 자기 밖에 모르고. 공주 병도 있었다. 새침때기 소녀였다. 어느 날 언니가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이런 길도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많이 읽은 책이 톨스토이의 <인생론>이었다. 어렸을 때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것 같다.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선한 일을 이웃에게 하기 위해 수도 생활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니는 오빠와 나 등 다 자신처럼 되기를 바랬다. 수녀원에서 못산다고 그런 말을 한 사람이었는데, 제가 살아보니 살만하다. 면접 때 왜 수녀가 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좀더 넓은 사랑을 하고 싶고 수녀에 대해 부정적으로 갖는 이미지를 쾌활하게 하고 싶고,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기쁨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몇 십년 지나서 돌이켜보면, 뭣 모르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 다 이뤄주시지 않았나 생각든다. 철없이 선택한 것처럼 했지만, 반 세기가 지났다는 것이 내 스스로가 자축하게 된다."

그러나 이 수녀는 '다시 태어나셔도 똑같은 길을 걷겠나'라는 질문에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다시 태어나면 덜 힘든 것을 하고 싶다. 사람은 모르잖아요. 다시 태어나면 다시할지 어떻게 알겠나. 모르는거죠. 사람들이 멋있는 치마 입고 하는 것 해보고 싶기도 하다."

계속해 이 목사는 왜 시를 쓰는지 물었다.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 등 가족들이 시를 읊었다. 초등학교 때 글 짓기 숙제를 주면 나름대로 적어가면 선생님이 솔직히 고백하라고, '누가 써준 게 맞지?'라고 물으셨다. 굉장히 상처를 받게 됐다"며 "수도원에 가면 포기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기에 몰래 몰래 썼던 것이 <민들레 영토>로 태어난 것이다. 수녀원은 규칙이 엄했다. 5~10분 늦으면 반성문을 읽혔다. 이럴 때 어린 마음에 '보따리 싸서 집에 가야지'라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바다여 당신은>이라는 시를 썼던 것이다. 이런 일을 겪었을 때 바다를 바라보며 쓴 시가 이 시다. 결국 수련의 방법이기도 했다. 개인의 역사 안에서도 불평과 푸념을 할 수 있는 시간에 시를 통해서 다시 한번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동시대를 사는 종교인들이 스스로 개선해야 될 태도에 대해 이 수녀는 "독선이라고 할까... 겸손이 부족한 것 같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배타적 모습 말이다. 평신도 보다 신부님이나 목사님이라던가 하는 분들이 입만 열면 가르치려고 한다. 너무 쉽게 말을 하고. 친구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군림하려고 한다"며 "너무 내 것이 옳다고 하는 게 있다. 정말 겸손해야겠다. 받아들임과 이해, 수용하는 자세가 고쳐야될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화가날 때 이 수녀는 어떻게 대처할까? "경험을 통해 터득한 건 수도복을 입고 화를 내면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땅한 화를 냈다고 생각해도 당한 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화를 낸 것만 기억한다. 낼만 했다라는 것을 사람들이 다 잊어버리는 것을 봤다. 제복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화를 내면 '걸림돌을 만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됐다. 그 순간을 넘기려고 '자비를 베푸소서'하며 견딘다. 그렇게 해서라도 화를 다스린다. 화를 냈을 때 어떠한 결과를 맞게 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의 연습인 것 같다. 여러분들도 이 기회에 막말을 하지 않기로 해보자. '골 때리네'라는 말 대신 '아, 정말 보통 일이 아니죠?'라고 하는 건 어떤가. 한국 사람들은 너무 죽고, 때리고라는 이런 것을 좋아한다. '그만뒀다'고 하면 될 것을 '때려치웠다'고 하고 말이다. 서랍 속에 메뉴를 잘 정리해 놓듯 상황에 따른 말들을 정리해두면 어떨까 생각이 든다. '이 상황에서는 이런 말을 하자'라는 것 말이다."

이에 이 목사는 "사람이 하는 말을 그 말이 공기를 진동해서 상대에게 전해지기 전에 그 말은 자기의 청각을 울린다. 자기가 하는 말은 자기가 가장 영향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상처를 받으면 어떻게 치유하는지에 대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밖에 답이 없는 것 같다. 신자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면서 답을 찾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아프고 슬픈 시들을 많이 쓰게 되더라"라고 말했다.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들에게 수녀님의 시를 들려달라"는 이 목사의 주문에 이 수녀는 <슬픈 사람들에겐>과 <슬픈 위로>를 낭독하기도 했다.

이어 " 수녀님에게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고 또 수녀로 살아가는 수녀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어머니 얘기를 하면 울 것 같은데... 삼십 대에 혼자가 되셨다. 강원도 분이셨고 배움이 짧은 분이셨다. 신앙적인 면에서 지혜로운 분이셨다. 수도 생활을 절반은 어머니에게 공을 돌리게 된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때는 어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것을 듣고 기차에서 울었던 기억이다. 이런 옷을 입고서도 기차에서 너무 많이 울었다. 감정이 통제가 안됐다. 비록 돌아가셨지만, 제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모르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어머니는 어려운 게 뭐가 문제냐고. 예수님에게 물어본다고. 버스 번호를 잊어버리면 버스 번호도 알려주신다는 말을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떤 경우에도 막말을 하지 않으셨다. 돌아가시기 전에도 '내 몸이 안정적이지가 못해'라고 말하셨다. 그냥 아프다고 하면 될 것을 말이다. 어머니는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니. 인간 안에 있는 이기심 때문이지'라고 말하셨다. 이런 성품을 갖고 계신 분이셨다. 가끔 꿈에도 나타나신다. 또 하나의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느낄 수 있는 분이셨다."

이 목사는 "질문이 있는 사람만 답을 한다. 그동안 많은 감동적인 시를 쓰셨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질문을 갖고 있어서 시로 드러나지 않았나 한다. 이 시대에 대해 갖고 있는 질문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는데, 어렵게 생각되는 것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할 것이라는 부분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왜 저렇게 싸울까하는 점, 그리고 남·북한의 문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또 여성들이 왜 저렇게 외모에 집착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다 싶다. '나도 세상에 있었다면 저렇게 됐을까'하는 생각이 든다"고 답했다.

개신교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말했다. "대학 축제 등 이런데 다니면서 인상 깊었던 건 반응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박수도 쳐주시고. 가톨릭은 잘 안그러거든요. 인색하고 그런 게 있다. 개신교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 찬양을 굉장히 아름답게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찬양을 들을 때 가끔은 '여리게도 해보지'하는 생각도 든다. 피아노 쳐서 하며 하는 것 말이다. 찬양을 들으면 너무 힘이 나는데, 가끔 '작게 하는 거 없나?'하는 생각이 든다. 장점은 또 어디를 방문하면 눈을 감고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목사님은 준비된 설교를 하고 듣는 사람들은 깨어 있는 모습도 좋게 보였다. '작정 기도'라는 것도 신선했다. '작정하고 기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우리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 수녀는 100주년기념교회의 창립 9주년을 축하하며 <생일을 만들어요 우리>라는 제목의 시를 읽으며 축복의 마음을 전하며 대담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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