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제프 파운틴 작가의 기고글인 "전쟁의 불길한 경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Engaging with a disturbing warning of war) 11월 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제프 파운틴 작가는 슈만 유럽 연구 센터(Schuman Centre for European Studies)의 창립자이며 1990년부터 YWAM 유럽의 이사로 재직하며,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 변화된 정치 환경에서 활동해왔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전쟁을 준비하라.” 국제 기도 운동 ‘24-7 기도 운동’을 시작한 영국의 피트 그레이그(Pete Greig) 목사가 전한 이 경고는 오랜 평화에 익숙한 영국 교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2026년 8월 와일드파이어 페스티벌(Wildfires Festival)에서 그레이그 목사는 기도하던 중 이 말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고 털어놓았다.
누구도 평온한 일상이 무너지고, 내일을 장담할 수 없으며,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마저 위협받는 상황을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경고를 들으면 과장이라 여기고 넘기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도 운동을 이끌어 온 그레이그 목사의 말은 쉽게 흘려듣기 어려웠다.
평화는 당연한 일상이 아니었다
그레이그의 경고를 들으며 필자는 8년 전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마이단 독립광장에 섰던 때를 떠올렸다. 그곳은 오렌지 혁명과 존엄성 혁명을 거치며 우크라이나인들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했던 상징적인 장소다.
자유를 위해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리는 깃발과 기념비 사이에서, 필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경 너머에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공화국이 번영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눈앞의 아름다운 건물들 위로 언젠가 미사일이 쏟아지는 광경까지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우려는 현실이 됐다.
크림반도 침공에 이어 전면전이 발발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은 공습경보와 무너진 집, 피란길에 오른 가족, 사랑하는 이가 무사히 돌아올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살아왔다. 그동안 교회는 피란민에게 잠자리를 내어주고, 식사를 마련하고,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북돋는 곳이 됐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신들이 겪는 전쟁이 국경 안에서 끝날 문제가 아님을 일찍이 깨달았다. 유럽의 안보와 국제 질서가 걸린 문제라고 서구 사회에 거듭 경고해 왔다.
서구 사회는 지난 80여 년간 누린 평화와 번영을 당연하게 여겨 왔다. 자유롭게 국경을 넘고, 슈퍼마켓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전기가 끊길 걱정 없이 생활하며, 자녀 세대가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전쟁과 침략, 전염병과 기근, 박해와 정치적 혼란이 되풀이된 유럽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처럼 오랜 안정은 드문 일이었다. 서유럽의 평화는 앞선 세대의 희생과 노력, 제도와 동맹, 오랜 경제적 협력 위에서 가까스로 이어져 왔다.
교회도 안락함을 하나님의 복과, 안보를 구원과, 물질적 풍요를 진보와 쉽게 동일시해 왔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승리를 두고 ‘역사의 종언’을 말하는 동안, 정작 그 평화를 지탱해 온 용서와 화해, 신뢰와 연대,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위한 책임은 뒷전으로 밀리기 쉬웠다.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는 시민들이 공적인 책임을 잊고 ‘빵과 서커스’에만 관심을 쏟는다고 한탄했다. 즐길 거리와 편리함이 넘치는 오늘날에도 그의 풍자는 낯설지 않다.
전쟁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하는가
그레이그의 경고는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제기해 온 안보 위협을 교회가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움직임, 미국의 행보, 서구 사회 내부의 극우 세력에 대한 우려까지, 교회 역시 이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여러 나라가 군비를 늘리던 때, 루터교 부흥운동가 프랭크 북만(Frank Buchman)이 ‘도덕적 재무장’을 촉구했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위기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크라이나 교회의 경험은 이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보여준다. 전쟁은 성도들의 삶에서 무엇이 우선인지를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종말의 때를 계산하거나 공포와 증오에 사로잡히기보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하나님 앞에 가져갔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막강한 적군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역대하 20:12).
우크라이나 성도들에게 기도와 행동은 한데 이어져 있었다. 방공호에서 예배를 드렸고, 교회는 비상 발전기와 식량을 나누었다. 성도들은 부상자를 돌보고 유가족을 위로했으며, 피란민을 맞아들였다. 목회자와 군종목사는 전쟁의 무게를 견디는 군인과 성도들의 곁을 지켰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평화로운 곳에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미루기 쉬운 질문을 매일 마주했다. 침략에 맞서면서도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가.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증오에 굴복하지 않고 어떻게 약자를 지킬 수 있는가. 고통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소망을 붙들 수 있는가.
삶의 끝이 가까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면 평범한 하루와 가까운 사람의 존재가 새롭게 다가온다. 전쟁도 우리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누구에게 기대어 살아가는지를 드러낸다. 사소한 다툼은 중요성을 잃고, 가진 자원은 생존과 꼭 필요한 일에 쓰인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일은 공동체가 버티는 데 필수적이다.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며,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불평 없이 대접하라고 권면했다(베드로전서 4:7~10).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에베소서 6:12). 그가 권한 무장은 진리와 의, 믿음과 구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였다. 교회는 위기의 순간에도 증오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에 소망을 전하는 공동체로 서야 한다.
그 소망은 모든 일이 잘 풀리리라는 낙관이 아니다. 익숙한 모든 것이 흔들려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시다는 믿음이다. 우크라이나 복음주의 교회들은 전쟁 속에서 보여 준 섬김을 인정받아 유럽복음주의연맹이 주최한 행사에서 ‘소망의 상’을 받기도 했다.
사이렌이 울리기 전에 할 수 있는 일
첫째, 기도를 첫 반응으로 삼아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본 뒤에야 기도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도는 현실을 직시하고,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으며, 무엇을 지켜야 할지 분별하고, 필요한 행동에 나설 용기를 얻는 자리다.
둘째, 삶을 단순하게 꾸려야 한다: 불필요한 소비와 빚을 줄이고, 안락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습관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눔과 금식, 손님 대접, 가진 것에 만족하는 법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물자를 마련할 때도 내 가족의 필요와 함께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위기를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은 “내가 무엇을 더 누릴 수 있는가”보다 “이웃을 위해 내가 무엇을 내어줄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셋째,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 교회는 평소에 서로의 형편을 살피고, 노인과 장애인, 홀로 지내는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돌봐야 한다. 혼란 속에서도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는 위기가 닥친 뒤에야 서둘러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넷째, 십자가를 지는 제자도를 다시 배워야 한다: 예수께서는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부르셨다. 교회는 다음 세대에게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 그치고 있지는 않은지, 대가를 치러야 할 때에도 신앙을 지키는 법을 삶으로 보여주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다섯째, 공동선을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민주적 자유와 국제 질서, 공공 제도가 위협받을 때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개인의 신앙생활에만 머물지 않는다. 평화를 이루고, 진실을 말하며,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특정 국가나 정치적 노선, 군사 동맹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여섯째, 두려움 속에서도 신실함을 선택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마태복음 24:6). 위협을 가볍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판단과 행동을 좌우하지 않게 하라는 뜻이다.
앞으로 몇 년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큰 전쟁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지금의 평화와 번영이 언제까지나 이어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레이그의 경고를 들은 교회가 던져야 할 질문은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가 아니라, 일상이 흔들릴 때에도 기도하고 이웃을 돌보며 신실하게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준비는 사이렌이 울리기 전, 오늘의 일상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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