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조로아스터교와 지형적 영향을 받아 모두 유일신을 믿지만, 그 유일신의 이름은 각각 다르다. 유대교는 ‘야훼(Yahweh)’를 믿고, 기독교는 ‘갓(God)’을 믿고, 이슬람교는 ‘알라(Allah)’를 믿는다. 저마다 유일하다고 믿는 신의 이름이 다르기에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가령 기독교는 이슬람교의 유일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교도 이슬람교의 유일신을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예수도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흔히 ‘적대적 관계’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명확하게 짚고 갈 진실이 있다. 이슬람교의 ‘알라’는 ‘갓’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갓’을 이슬람교에서 번역하면 ‘알라’가 된다. 실제로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 유대교와 뿌리가 같다. 핵심은 예수가 그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친 데 있다. 그러니까 부와 명성,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게 예수의 가르침이다. 부와 명성, 권력의 유혹과 선을 그으며 거듭난 예수는 광야에서 나와 ‘차별의 땅’ 갈릴리로 돌아간다. 사람들을 일깨워가기 시작한다. 기독교는 그걸 ‘복음’으로 부른다.
손석춘 - 교양으로 읽는 기독교
여기까지 인도하셨네. 에벤에셀, 돌아보니 한 길이었다. 1976년 캠퍼스의 봄 그분을 뜨겁게 만나 달려온 오십 년 뒤안길에서 보니 길은 셋이 아니었다. 출발이 달랐던 사랑길과 꿈길과 생명길 굽이 굽이 돌아 마침내 한강이 되어 은혜의 바다로 흘렀다. 젊은 날에는 내가 길을 만드는 줄 알았다. 문을 열고, 깃발을 세우고 사람을 모으고 언약을 끌어당기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세월이 가르쳐 주었다. 내가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길이 되어 주셨다고. 내가 꿈을 붙든 것이 아니라 그분의 꿈이 나를 붙들었고, 내가 세계를 품은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하신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열방으로 보내고 있었다. 느즈막에 그분과 밀착하다 보니 '되겠다'가 아닌 '되리라'의 삶! 수동태 영성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해답이 아닌 임재를, 통제가 아닌 이끌림을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삶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죽음을 지나 생명으로 갔다. 내 고집이 죽고, 내 이름이 작아지고, 내 손이 비워질 때마다 누군가가 살아났다.
황성주 - 거룩한 리듬을 흘려보내라
마이크로처치는 작아서 마이크로가 아니다. 다르기 때문에 마이크로다.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방향의 문제다. 저수지는 물을 담는다. 강은 물을 흘려보낸다. 저수지는 크면 클수록 더 많이 담을 수 있다. 강은 크기보다 흐름이 중요하다. 작은 강이라도 쉬지 않고 흐르면 바다에 닿는다. 마이크로처치는 저수지가 아니라 강이다. 값 없이 전한다. 대가를 받지 않는다. 그래야 더 자유롭게 전할 수 있다. 재정에 묶이지 않아야 말씀에 묶일 수 있다. 생활비 걱정이 없어야 복음 걱정을 할 수 있다. 바울의 천막은 생계 수단이 아니었다. 복음의 자유를 지키는 방패였다. 나의 마케팅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갔다. 기도가 길어졌다. 손님들을 위해 기도했다. 아직 오지 않은 손님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 동네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하다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해졌다. 매출 0원의 날이 기도하는 사람을 만들었다. 가장 비어 있는 날이 가장 채워지는 날이었다.
김민기 - 마이크로 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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