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소피 커닝햄과 ‘혼란의 신’의 대결"(Sophie Cunningham vs. the god of confusion)을 8월 24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불쌍한 소피 커닝햄(Sophie Cunningham). 이 WNBA 스타 선수는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 스포츠에서 경쟁하는 것이 불공정하고 위험하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가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그녀의 발언은 곧바로 정치적·문화적 논쟁의 중심에 섰고, 진보 진영에서도 강한 비판이 쏟아졌다.

커닝햄의 발언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는 WNBA 단체협약(CBA) 제13조에 명시된 “여성인 선수만 자격이 있다”는 문구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드러난다. 필자가 보기에는 마치 풍자 매체 바빌론 비(Babylon Bee)가 켄터키 더비 주최 측이 ‘말(horse)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기 위해 위원회를 소집했다고 보도하는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다. 그만큼 한때 자명하게 받아들여졌던 개념들이 이제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시 커닝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필자 역시 이 문제에서는 그녀와 비슷한 입장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필자를 포함해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거의 모든 스포츠는 경기력 향상 약물(PED)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약물이 선수에게 부당한 근력과 속도, 회복력의 이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와 테스토스테론 계열 물질은 경기력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이유로 규제된다.

약물 문제를 떠나 체격과 근력 차이를 고려해 체급을 엄격히 나누는 스포츠도 많다. 라이트급 복서와 헤비급 복서를 같은 조건에서 경쟁시키지 않는 이유는 체격과 힘의 차이가 경기 결과와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포츠가 신체적 우위를 만들어내는 외부 요인을 이처럼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면, 사춘기 이후 남성 신체가 갖게 되는 평균적인 근력과 골격, 체격상의 차이를 여성 스포츠의 공정성과 안전 문제에서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인위적으로 투여된 경기력 향상 물질은 금지하면서도 자연적인 생물학적 차이가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면, 그 논리는 충분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필자에게 이는 단순한 정치적 구호의 문제가 아니라 스포츠의 공정성이라는 원칙과 관련된 문제다.

그리고 필자는 오늘날 이러한 문화적 논쟁을 이해하는 데 ‘혼란스러운 사고(confused thinking)’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 비교적 분명하게 받아들여지던 많은 개념이 다시 질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은 무엇인가. 결혼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인가. 옳고 그름의 기준은 무엇이고, 정의와 자유는 무엇인가. 심지어 ‘현실(reality)’ 자체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지마저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성경은 이러한 혼란을 바라보는 기독교적 기준을 제시한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리를 흐리고 질서를 무너뜨리는 혼란이 지속될 때, 그리스도인은 그 배후에 어떤 영적 문제가 존재하는지도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질서와 혼돈

성경은 하나님을 진리를 계시하시고 질서와 평화를 이루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반대로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인간을 속이는 존재로 등장한다.

따라서 혼란과 속임수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체계적으로 대체하려 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 현상을 단순한 지적 의견 차이로만 바라보지 않을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모든 혼란을 영적 공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기만을 통해 진리를 흐리게 만드는 일에는 분명 영적인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창세기 3장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뱀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말씀하시더냐.”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되고 의심의 대상이 되며, 결국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악의 기준 대신 스스로 선과 악을 규정하려 한다.

문제는 단순한 질문 자체가 아니다. 성경에서 질문과 탐구는 금지되지 않는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해 인간 스스로를 최종적인 진리의 판단자로 세우는 데 있다.

야고보는 이러한 지혜를 두고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라고 말한다(약 3:15). 이어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경고한다(약 3:16).

여기서 ‘혼란’으로 번역되는 말은 단순히 생각이 복잡하거나 무엇을 몰라 당황하는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무질서와 동요, 안정된 질서가 흔들리는 상태를 포함한다. 필자는 이 표현이 오늘날의 문화적 풍경과 일정 부분 맞닿아 있다고 본다.

현대 사회에서는 기존의 권위와 기준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물론 권위 자체를 검증하고 잘못된 전통을 바로잡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기준과 권위를 해체한 뒤 인간의 욕망과 선택만을 최종 기준으로 삼기 시작한다면, 결국 무엇이 참인지 판단할 공통 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거부하는 태도를 거짓의 아비인 마귀와 연결하신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3-45).

이 말씀은 상당히 강하다. 그러나 핵심은 분명하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거짓과 진리의 왜곡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혼란’과 심판

성경은 때로 혼란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도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벨탑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창 11:9).

로마서 1장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사람들이 진리를 억누르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며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숭배할 때, 결국 그들이 자신의 욕망과 왜곡된 사고방식에 내어맡겨지는 모습을 묘사한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지만 어리석어지고, 진리를 거부한 결과 도덕적·지적 혼란이 심화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혼란을 경험하는 모든 사람이 사탄의 영향을 받고 있다거나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본래 제한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존재이기에 얼마든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신학 문제를 포함해 선의의 사람들이 동일한 사실을 놓고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단순한 의견 차이와 의도적인 진리 왜곡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기만이나 파괴를 목적으로 현실 자체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사회 전체가 인간과 성, 도덕, 자유, 정의처럼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 공유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질 때, 그리스도인은 최소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이 혼란은 누구에게 유익한가.

필자가 보기에는 그 결과가 인간의 자유와 행복에 반드시 유익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결국 질문은 ‘누가 현실을 정의하는가’다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 스포츠에 참여하는 문제를 두고 소피 커닝햄을 비롯한 많은 사람은 공정성과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성별 정체성과 차별금지라는 관점에서 전혀 다른 결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 논쟁의 더 깊은 층에는 스포츠 규정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놓여 있다.

누가 현실을 정의할 권한을 갖는가? 현실은 인간의 욕망과 자기 인식에 따라 바뀌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받아들이고 발견해야 하는 객관적인 질서가 존재하는가.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질문은 단순한 정치적 논쟁이 아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관한 문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질서를 두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란 현실을 원하는 대로 다시 정의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 안에서 선하게 살아가는 자유다.

필자는 이것이 오늘날의 문화적 갈등에서 놓쳐서는 안 될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욕망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실의 의미 자체를 새롭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영역이라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끝없는 혼란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지혜롭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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