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브렌트 풀턴 박사의 기고글인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핵심 조건이다'(Abiding in Christ is a key requirement for God's mission)를 8월 1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브렌트 풀턴 박사는 차이나소스(ChinaSource)의 설립자로, 2019년까지 초대 대표를 역임했다. 그에 앞서 휘튼칼리지 중국연구소(Institute for Chinese Studies)의 운영 책임자로 섬겼으며, 그 이전에는 중국선교인터내셔널(China Ministries International)의 미국 초대 대표와 홍콩 중국교회연구센터(Chinese Church Research Center)의 영문 출판 편집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중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을 섬기는 멤버 케어 전문가 네트워크를 이끌고 있으며, 중국의 종교 정책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여러 기관에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중국 교회에서 뻗어 나오는 선교 운동이 점차 자리를 잡고 세계 교회가 이 운동과 협력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동역이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질문도 커지고 있다.
이 시리즈의 1부에서 필자는 선교가 주로 ‘경영의 실무’처럼 다루어질 때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살펴봤다. 수단과 목적이 뒤섞이고, 그 결과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마저 흐려질 수 있다는 문제였다.
가시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몇몇 선교 활동만을 중심으로 운동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도록 부름받은 다른 중요한 측면들을 외면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가 될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신 말씀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소속됨에서 시작하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7~8) 그리스도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가 필수적이다. 제자가 자기 자신과 다른 신자들, 그리고 세상과 맺는 모든 관계는 바로 이 친밀함에서 흘러나온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여기서 말하는 열매가 인간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열매는 가지가 이를 악물고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자연스럽게 맺힌다.
‘거한다(abide)’는 것은 머무르는 것, 쉼을 누리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참된 자리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 없는 삶(A Non-Anxious Life)』의 저자 앨런 파들링(Alan Fadling)은 이렇게 적었다: “예수님은 애쓰고 분투하는 삶이 아니라 연합에서 비롯되는 ‘머무름’과 ‘거함’, ‘살아감’을 자주 말씀하신다. 리더들이 주님 안에 거할 때 그들은 더 이상 결과나 타인의 인정, 성과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지 않는다. 더 단단한 내적 중심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그 존재 자체가 주변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참된 제자로 살아가며, 그 삶에서 맺히는 열매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나 여기서 주어지는 핵심 명령은 열매를 억지로 ‘맺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가지가 해야 할 일은 열매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자양분을 공급받고, 그 생명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이다.
열매는 주님 안에 거함으로 맺히는 결과다. 거함이 없다면 참된 열매도 없다. 열매는 제자도의 외적인 증거가 될 수 있지만, 그 열매 자체가 제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제자의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doing)’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로 ‘존재하는가(being)’에 달려 있다. 생산성이 아니라 관계에서, 분주한 활동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의존에서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종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증거이지, 순종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거짓된 정체성
제자들은 주님 안에 거할 때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마치 가지가 자신이 붙어 있는 포도나무의 생명과 성질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반대로 제자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무언가에 자신의 삶을 깊이 뿌리내린다면, 그는 결국 그것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어떤 전략이나 프로그램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겉으로는 매우 생산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영적인 열매를 만들어낼 수 없다.
‘선교사’라는 직함과 정체성 자체에 뿌리를 내리는 사람은 선교사답게 보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 있다.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고, 열악한 환경을 견디며, 고향의 안락함과 익숙한 삶을 포기하는 등 수많은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특정 선교 단체나 리더와의 관계에 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의존하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보다 그 조직이나 지도자의 모습을 더 닮아가게 될 위험이 있다.
사역 현장에서 결과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이러한 거짓 정체성은 더욱 강화된다. 많은 경우 영적 열매가 보이지 않는 이유가 죄나 헌신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생산적으로 ‘보이기 위해’ 자신의 은사와 역량을 벗어난 일을 억지로 감당하도록 내몰린 결과일 수 있다.
이들은 ‘자아에 대해 죽는다’는 명목 아래 무조건 주변에 맞추고, 무리에 섞이기 위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까지 고통스럽게 감당하며, 그저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15장 11절이 말하는 기쁨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자신이 섬기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을 사랑하기는커녕, 바로 옆의 동역자를 사랑하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평안은 사라지고, 자신과 타인을 향한 조급함과 짜증만 커진다.
더 철저히 훈련받고, 더 절제하며, 더 많이 순종하면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면 오히려 절망과 무가치감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선교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라고 요구하는 리더십 역시 같은 문제를 만들어낸다.
플랜 B는 없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더 많은 일을 하거나 새로운 전략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리로 진실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역자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선택일 수 있다. 특히 팀이나 파송 기관에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리더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리더의 정체성이 과거에 설정한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과 깊이 얽혀 있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하기 위해 그 목표들을 다시 검토하거나 때로는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다.
조직에게도 위협적일 수 있다. 단체의 ‘브랜드’가 외적인 성공 지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플랜 B는 없다. 그리스도의 “내 안에 거하라”는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주님 안에 머무르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일을 해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같다.
이러한 내적인 씨름이 선교의 진전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이 열방 가운데 그분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도록 그들의 내면을 다시 빚어가시는 과정일 수 있다.
진척이 느려 보이는 이유가 반드시 사역자들이 더 빨리 움직여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 있다. 속도를 늦추고,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을 빚어가시는 그리스도의 손길 아래 잠잠히 머물러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명과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풀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육체적인 한계와 정서적인 상처를 직면하고 받아들이려면 자기 자신을 향한 연민과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이해도 필요하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태도와 행동을 드러내시도록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기 위해서는 진정한 겸손과 정서적으로 안전한 환경이 필요하다.
사역자들이 이러한 모든 과정을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에 맡기고, 자신의 약점과 상처를 사역의 ‘부적격 사유’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이끄시는 자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자유가 찾아온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과 사역을 위해 준비하신 자리로 더 온전히 나아갈 수 있다.
사랑이 요구하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 고독과 침묵을 훈련하는 것, 기도와 묵상, 고백과 같은 영적 실천은 이러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이마저 또 하나의 프로그램이나 의무가 되어버리면, 유익한 영적 훈련도 얼마든지 율법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
과업 지향적인 사람은 이런 훈련까지 ‘해야 할 일 목록’에 추가해 놓고, 성령의 역사에 실제로 자신을 내어드리기보다는 또 하나의 과제를 처리하듯 수행할 수 있다. 반대로 관상적(contemplative) 성향이 강한 사람은 영적 훈련 그 자체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삶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에는 저항할 수 있다.
영적 훈련을 통해 성장해야 할 삶의 명백한 문제들을 외면하거나, 자신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실천의 횟수나 강도만으로 영적 성장을 측정할 수는 없다.
다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열매의 핵심 척도는 결국 ‘사랑’이다. 제자들은 무엇보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세상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말한 성령의 열매 역시 대부분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사랑과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그러하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동역자들을 향한 사랑은 사역 현장에서 지속적인 열매가 맺히기 위한 전제 조건이며, 그 모든 열매가 흘러나오는 마르지 않는 근원이다.
이 사랑이라는 열매는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결코 부차적인 지표가 아니다. 오히려 사역자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가족 관계가 어떠한지, 그들의 결정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통해 드러난다: 그들은 로마서 12장 10절의 말씀처럼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가, 부부 사이에는 깊이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자녀들은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고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는가, 동역자들은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문화와 성향의 차이에 따라 사랑이 표현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한 문화권에서 사랑으로 여겨지는 행동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무례하거나 무관심하게 보일 수 있다. 또 지나친 간섭이나 우월감을 드러내는 행동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게리 채프먼(Gary Chapman)의 연구가 보여주듯, 사람마다 사랑을 주고받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가장 큰 계명’을 실제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에도 영향을 준다. 특히 다문화 팀에서는 서로 다른 기대를 이해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매우 어렵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사랑이란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는 일일 수 있다 ‘지금 이 관계 속에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사람보다 성과가 앞설 수 없다
이른바 ‘성과’라는 지표가 사역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관계의 역기능과 상처는 너무 쉽게 무시된다. 사람들이 다치더라도 그것을 목표 달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수적인 피해처럼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람보다 성과를 앞세우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신다는 복음의 메시지와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역자들의 삶 속에서 가장 실제적으로 빚어지는 장소는 역설적으로도 잘 정리된 전략 회의실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한가운데다.
갈등과 상처, 오해와 차이가 뒤섞인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회복되고 서로 화목하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을 향해 드러난다.
만물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려고 오신 그리스도의 형상이 바로 그곳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선교의 출발점은 결국 ‘거함’이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원리는 너무나 기본적인 진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현지인이든 외국인이든, 중국인이든 비중국인이든 수많은 사역자에게 이는 여전히 급진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생명력 있는 관계 속에서 삶과 사역을 길어 올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성과보다 관계를 우선하고, 속도보다 형성을 선택하며, 자신의 힘보다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사역자 자신이 변화되고, 팀이 변화되며, 결국 지역 공동체도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선교 현장에서 진정한 동역이 꽃피울 수 있는 가장 견고한 토대다.
하나님의 선교는 더 많이 일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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