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 나지 않는 약소국가 위해 희생하고 지켜줄 나라는 없어
안이하고 무지한 대한제국의 무능이 외교 참사 불러들여”

 

1907년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가 순국한 곳에 세워진 이준열사기념관. 광복 50주기, 이준 열사 순국 88주기를 기념하여 1995년 개관했다.
1907년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가 순국한 곳에 세워진 이준열사기념관. 광복 50주기, 이준 열사 순국 88주기를 기념하여 1995년 개관했다.

열강들이 각축하던 시기에 세계 평화를 도모한 만국평화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제1차 회의가 1899년 헤이그에서 2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헤이그가 회의장으로 선택된 것은 네덜란드가 당시 대표적인 중립국이었고 여러 차례 평화 회의를 개최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6월 15일 제2차 회의가 속개되었고, 그해 10월 18일 폐막한 만국평화회의는 ‘국제 분쟁의 평화적 체결에 관한 협약’ 등 협약 13개와 선언 2개, 그리고 권고 5개 등 국제사회의 새 규칙을 만들어 냈으며, 1909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 설치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45개 참가국 대표가 20세기 국제사회의 새 판을 짜는 회의가 한창일 때, 회의장 밖으로 밀려난 대한제국의 밀사들은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독립을 알리는 외교 활동에 착수했다. 숙소인 드용 호텔(현재 이준열사기념관)에 태극기를 내건 이들은 6월 27일 각국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보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렸다.

7월 8일 이위종은 ‘대한제국의 호소’를 발표했다. 내용은 이렇다. “일본군이 기마병과 보병, 그리고 포병 부대까지 동원해서 서울을 둘러싸고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1905년 11월 15일 이토는 고종 황제를 위협하여 소위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협박했다.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주머니를 훔치는 위선적인 일본은 백주의 강도보다 더 비열하고 야수적인 것이다.”

헤이그 중앙역에서 서쪽으로 운하를 건너면 프린세스가 6~7번지에 닿는다. 붉은 벽돌의 낡은 3층 건물에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 당시 각국 대표단과 사회운동가, 기자들이 모이는 국제 서클이 있었고, 이곳에서 이위종이 한국의 호소를 발표하였다.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기대를 갖고 일본의 주권 침해와 만행을 고발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밀사 파견에 대한 일본의 위협에 밀려 1907년 7월 19일 강제로 퇴위당했다.

이어 고종의 친위대 등 모든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된 1907년 8월 1일부터 대한제국의 중앙군인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 등 상당수 장교단과 병사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고종의 퇴위를 막으려 했지만, 기밀이 새어 실패하고 말았다. 쿤 드 퀘스터 네덜란드 교수는 헤이그 특사단이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막지는 못했지만, 대한제국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과 국가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법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고종의 밀사들이 ‘길거리 외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흔히 일본의 악랄한 방해 공작을 거론하며 믿어 왔다. 하지만 최근 학계는 일본뿐 아니라 영국, 미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들도 한국의 만국평화회의 참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증거와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당초 한국을 초청했던 러시아는 1906년 이즈볼스키 외상 취임과 함께 영국 및 일본과의 타협을 추진하면서 입장을 바꿨다.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으로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것을 인정했던 영국은 을사늑약 이후 주한 공사관을 철수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와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의 공사관 철수도 주장하며 일본에 적극 동조했다.

1905년 7월 27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승인한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약한 국가 때문에 문명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사태를 막자는 것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숨 막히는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 한복판에서 우리는 중립국을 선언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도 우리를 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이하고 무지한 당시 대한민국의 무능이 외교 참사를 불러들인 것이다. 또한 아무 이익이 나지 않는 약소국가를 발 벗고 나서서 희생을 각오하고 지켜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는 냉혹한 국제사회의 교훈을 고종과 대신들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이범희 목사
이범희 목사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 소장과 국제유고전범재판소 부소장으로 한국인들이 당당하게 근무하고 있다. 화학무기금지기구에도 사찰관 3명이 진출해 있다. 네덜란드 주재 한국 대사는 네덜란드로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수많은 국제 행사에 부디 초청해 달라는 로비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100여 년 전에 참석조차 거절당했던 세 밀사가 하늘과 땅처럼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보면 자신들의 활동이 헛되지 않았다고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 눈이 뜨거워진다.

 

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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