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무역·투자, 디지털·혁신, 포용적 성장 등을 담은 ‘경주 선언’을 채택하고 지난 1일 폐막했다.  이재명 정부의 첫 다자 외교 시험무대였던 APEC은 자유무역과 다자주의의 중요성을 재확인한 동시에 연이은 한미·한중·한일 정상회담으로 ‘실용외교’를 선보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장 관심이 집중된 건 지난달 29일 미 트럼프 대통령과 가진 한미 정상회담이었다. 지난 7월 말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있었던 한미 정상 간 관세협상이 정부의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빈손’ 회담이었음이 드러나면서 경제 전반에 협상 타결 장기화에 따른 불안감이 고조됐던 터라 어떤 합의를 이룰지 재계뿐 아니라 국민적 이목이 쏠렸다.

경주에서 다시 만난 한미 정상은 최대 쟁점이었던 ‘연간 최대 200억달러 분할 투자’에 합의했다. 이 대해 양국 정부 사이에서 서로 다른 말이 나오고 있으나 합의가 확실하다면 국내 경제에 드리웠던 불확실성의 그림자를 어느 정도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한미간에 통상 불확실성이 해소됐다는 점에서 일단 급한 불을 껐다고 본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가장 큰 성과를 꼽으라면 미국이 한국의 핵 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것일 것이다. 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디젤 추진 잠수함은 북한이나 중국 잠수함 추적 활동에 제한이 있다”며 핵 추진 잠수함 보유 필요성을 강조하자 이에 트럼프 대통령이 곧바로 승낙했다는 게 놀랍다.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여러 고비를 넘겨야 하지만 이 자체만으로도 한미동맹이 더욱 굳건해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국이 핵 추진 잠수함을 보유하는 것이 곧 핵무장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핵잠수함이란 핵미사일을 탑재했다는 게 아니라 기존 재래식 잠수함 엔진이 핵연료로 가동되는 잠수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보유한 모든 잠수함은 디젤을 연료로 한 잠수함이다. 일정 시간마다 바다 위에 올라와 연료를 보충해야 문제로 북한과 중국 잠수함을 장시간 추적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핵연료를 쓰게 되면 사실상 무제한 잠항이 가능해져 북한과 중국에 대한 경계가 한층 촘촘해질 수 있다.

안보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이 핵 추진 잠수함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나 한미 원자력협정에 묶여 자체적으로 핵추진잠수함을 만드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 대통령의 요청에 원자력협정 개정을 약속했다는데 중요한 방점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에 앞서 도쿄에서 가진 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추진 원칙을 재확인했다. 사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포기하고 핵 보유를 묵인하는 듯한 언행으로 숱한 억측을 불러왔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 원칙을 분명히 함으로써 북핵 문제 대응을 미국 단독이 아닌 국제사회와 함께 풀어나가는 길이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30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서로를 "중요한 이웃"이라고 평가하고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자”고 다짐했다. 두 정상 간에 셔틀 외교 복원 의지가 재확인된 만큼 한·일 양국의 신뢰와 협력이 증대되기를 기대한다.

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의 첫 한중 정상회담은 성과보다 숙제를 많이 남긴 회담으로 평가된다. 이번 회담에서 양국이 호혜적이고 안정적으로 양국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자는 큰 틀의 공감대를 이뤘으나 최대 현안인 북한 비핵화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더구나 정상회담 후 합의문이나 공동 기자회견이 일절 없었다는 점에서 회담 성과를 거론하는 자체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만약 최근 북·중·러 밀착 속에서 중국이 북한 비핵화를 포기한 것이라면 우리의 친중 외교 전략도 반드시 수정돼야 할 것이다.

최근 중국의 서해 구조물 문제가 우리 안보에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어떤 의견이 오갔는지 깜깜하다. 중국이 지난 2016년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에 반발해 한국 기업의 콘텐츠와 연예인들의 활동을 막아온 이른바 ‘한한령’의 빗장이 풀어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 역시도 별다른 후속 조치가 없었다. 정상회담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눈에 띄는 결과물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 정부의 첫 한중 정상회담은 ‘빈손’으로 마무리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번 APEC 정상회의는 이 대통령이 개회사에서 밝힌 대로 “국제 질서가 격변하는 중대한 변곡점 위에서 협력과 연대만이 더 나은 미래로 이끄는 확실한 해답”임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한미 정상이 경주에서 다시 만나 관세협상의 핵심 쟁점에 긍정적인 진전을 이룬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APEC을 통해 그동안 교착상태였던 한미 관세협상의 돌파구가 마련된 건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핵추진 잠수함 건립 문제도 트럼프 대통령이 즉석에서 약속했으나 최종 목표인 북한 비핵화에 대한 대응책이라기엔 한참 부족하다.

APEC이 우리에게 준 성과이자 숙제는 미·중 간의 패권 대결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어느 편에서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본다. 북·중·러 군사동맹이 공고화되는 현실에서 친중 친북으로 기우는 외교는 스스로 곧 자멸을 의미한다. 미국 등 국제사회로부터의 이탈해 고립을 초래하는 외교정책의 근본적인 궤도 수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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