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애 박사
이경애 박사

기독교의 ‘사랑’은 누구나 아는 핵심 교리이자 가치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시고 좋다고 하신 창조의 사랑, 아들 예수님이 인간과 같은 시공간의 한계에 갇힌 몸으로 오신 성육신의 사랑, 오늘도 우리가 선한 길을 깨닫고 순종하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사랑은 우리 신앙의 시작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매체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드라마, 노래, 사연들이 모두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은가? 그 대상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나와 함께 하는 반려동물이든 식물이든, 그리고 어떤 숭배의 대상이든 우리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은 자명하다.

철학에서도 사랑은 심도 있는 관심 주제였기 때문에 사랑의 유형에 대해 여러 언급이 있어왔다. 특히 그리스에서는 사랑의 유형을 대략 3가지로 이야기 해왔다. 에로스(Eros), 필로스(Philia), 아가페(Agape)가 그것이다. 에로스는 육체적 매력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으로 본능적이고 감정적, 감각적으로 이끌리는 사랑을 의미하며, 필로스는 우정과 같은 것으로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친밀감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아가페는 영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나보다 남을 더 위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종교적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이 아가페적, 헌신적 사랑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겠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신다(마태복음 22장 39절).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는 더 나아가 이 이타적인 우리의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나아가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마태복음 5장 43-44절). 이 얼마나 숭고하고 거룩한 사랑의 완성형인가? 우리는 이 엄준한 예수님의 사랑의 명령앞에 나를 이웃 삼으신 예수님의 십자라 구원의 사랑, 아버지와 원수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하신 희생의 사랑으로 감격하고 회개하고 그리고 결단한다. 그렇다. 기독교의 사랑은 나의 한계와 조건과 필요와 감정을 넘어서는 타자를 향한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말씀 속에 등장한다. 그것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네 몸 이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네 몸을 무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닌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그만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발생하며 헌신적 행동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늘 사랑 해야 하는 엄중한 과제를 고민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내 몸을 사랑해야 하는 과제가 전제되어 있다. 즉, 나 자신을 사랑할 능력이 없다면, 사랑을 주어도 받을 힘이 부족하다면 내가 증거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사랑도 실상 빈약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전적 정신분석 이후 신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건강한 자기 사랑에 대해 고민해 왔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는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내 안에 내재화되어 있을 때 이 사랑은 타자를 향해 흘러갈 수 있는 기본적 힘이라고 본 것이다. 페어베언(W.R.D. Fairbairn)은 근원적인 관계 욕망에 대해 언급한 학자로 인간의 근원적인 동기가 타인들과 접촉하고 관계 맺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싶은 동기를 갖고 태어난 아기는 엄마와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데 질 좋은 양육 경험을 통해 이 욕구가 충족될 때 아기는 타인과 밀접한 상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즉 내가 전하는 사랑이 안전하기 때문에 맘껏 사랑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건강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능력도 성장 한다고 본 것이다.

사랑을 주려는 의지적인 노력은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의지만큼 나 자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다. 그 받고 누리는 사랑의 실력만큼 이웃과 원수를 향해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고 배려하고 있는가 돌아보자.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귀하게 사랑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주 양육자와의 관계 경험이 충만하지 못했다면 섭섭하고 슬프지만 그래도 괜찮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양육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며 그 안에 충만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배부른 만큼 나도 타인을 사랑할 힘을 얻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려고 애쓰다 소진된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사랑하고 돌보는 데 힘쓰자. 좀 그래도 괜찮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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