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잘못 혹은 부족하게 읽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대부분의 구절들을 그저 건성으로 읽고 치운다는 것입니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만 적용해서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맙니다. 요컨대 본문 안에서의 정확한 뜻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안에서의 정확한 뜻을 찾으려면 반드시 저자가 원래 강조하고자 했던 주제와 저작 의도에 비추어서 해석해야만 합니다. 또 저자의 뜻은 반드시 전체 문맥을 다 살펴야 알 수 있습니다. 저자의 뜻을 찾을 시도는 전혀 하지 않으니까 결과적으로 자신의 뜻에 끼워 맞춘 견강부회(牽强附會) 식 해석만 나옵니다. 자신이 성경 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용한 말씀에서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전체 문장 안에서 의미를 찾지 않고 그 구절만 적당히 이해하고 치웁니다. 먼저 “모든 무거운 것”은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현실적 어려움들을, 또 “얽매이기 쉬운 죄”는 자신이 자주 실패하는 시험이나 여전히 헤어나지 못한 잘못된 습관 등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예수님을 더욱 열심히 잘 믿어서 이겨내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이런 해석과 적용 그 자체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구절의 앞뒤에서 말하는 바는 완전히 무시했거나 아주 경시했다는 것입니다. 본 구절의 앞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에 관해서, 뒤는 예수님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더러 바로 앞 11장의 믿음의 선진들과 또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본받으라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입니다.

그럼 우리 주마간산(走馬看山)식 해석에 따르면 그들이 평생토록 현실 고난을 해결 받고 잘못된 습관과 죄를 고치는 데만 믿음의 싸움을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과연 이 해석이 타당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우선 예수님께 현실적 고난이 따랐고 불편하긴 했어도 그 문제의 해결만 받으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잘못된 죄나 습관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시니까 그렇다 쳐도 구약성경의 믿음의 위인들은 어땠습니까? 11장에 의하면 그들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려고 현실의 어떤 핍박도 믿음으로 견디어내었지 않습니까? 영원한 본향인 하늘에만 소망을 두었기에 썩어 없어질 이 땅에서의 형통과 안위와 출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무거운 것이나 얽매이기 쉬운 죄도 당연히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선 모든 무거운 것은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 등이 믿음으로 인내해야만 했던 현실적 제약과 핍박과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들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도 그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지만 그들처럼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권하면서 그분의 어떤 면을 강조했습니까?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주님도 이 땅에서 극심한 핍박을 겪었지만 당신 앞에 있는 즐거움 즉, 당신의 죽음으로 죄인을 구속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실 소망으로 인해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고 부끄러움도 개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흔히 이해하듯 믿음의 대상인 주님을 열심히 믿으면 모든 고난과 죄악을 없애주신다는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제 “얽매이기 쉬운 죄”에 대한 뜻도 명료해졌습니다. 헬라 원문과 영어 번역본에는 ‘죄’에 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 사람마다 쉽게 넘어지는 여러 도덕적 죄들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 가지 죄를 뜻합니다. 앞뒤 문맥을 따지면 바로 불신앙의 죄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예 믿지 않는 불신 즉, 무신앙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자체가 유대인 신자를 대상으로 기록된 편지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신자가 되면 도덕적 죄나 오랜 잘못된 습관은 고치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죄에 대해서 아주 민감해지기에 자칫 죄를 범해도 열심히 회개합니다. 훨씬 자주 넘어지는 죄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신자이면서도 현실적 제약과 핍박이 닥치면 믿음으로 제대로 인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적 방식을 동원하여 현실과 타협해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그전에 천국의 영광을 목표하지 않고 이 땅에서 형통과 안위를 목표로 하여 자기 뜻과 계획을 앞세우기에 세상과 충돌할 일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 벌써 불신자들의 방식대로 살고 있기에 세상의 제약, 조롱, 핍박을 겪지 않고 불편을 느끼지 못합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바에 따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는 예수를 바라보고 닮아가는 수고를 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3절이 어떻게 말합니까?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주님은 죄인들이 당신을 거역하고 핍박하여 고통스럽게 했고 또 멸시 조롱하여 부끄럽게 했어도 다 참으셨다고 합니다. 오직 죄인을 구원하는 사역을 완수함으로써 기다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의 영광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그 같은 일을 당해 피곤해질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예수님 같이 영광스럽게 변할 썩지 않는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 권세, 명예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정말 신자답게 삶으로써 따르게 마련인 여러 제약과 핍박과 조롱과 멸시가 비록 피곤하게는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더라도 중도에 절망하여 다시 불신자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신자가 얽매이기 쉬운 죄라는 것입니다.

엄밀히 적용하면 신자로서 불신자보다 나쁜 짓은 덜하고 때로는 더 선하게 살기는 하지만 인생의 목표를 하늘 보좌에 확실하게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를 비롯한 종교적 행사를 정기적으로 수행하고 도덕적으로 다른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롭게 살아도 실제적 삶의 방향은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며 또 하나님 뜻대로 그분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기 위해선 어떤 핍박과 조롱도 겁내지 않고 담대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란 가장 자주 짓는 죄입니다. 또 그래서 가장 시급하게 회개하고 고쳐나가야 할 죄입니다. 주님처럼 때를 얻든 못 얻든 십자가 복음만으로 세상과 당당하게 부딪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으로써 필연적으로 따라올 어떤 제약과 핍박과 조롱은 전혀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또 그래야만 도리어 자주 넘어지는 도덕적 죄나, 아직 헤어나지 못하는 오랜 잘못된 습관을 완전히 극복해낼 수 있습니다. 현실적 문제와 고난도 주님께서 당연히 대신 맡아 해결해 주심도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2012/4/30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