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김일석 박사
김일석 박사(임마누엘교회 담임, 장신대)

한경직은 해방정국에서 새로이 건설될 나라는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방책으로 전도를 통한 건국론을 전개했다. 이른바 전도입국론(傳道立國論)이 그것이다. 교회는 당회(堂會)라는 기구가 상징하듯 대의민주제로 운영되는데, 따라서 교회가 많아질수록 그 안에서 훈련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서 나라 역시 자연스레 민주화가 될 것으로 본 것이다. 해방정국 당시에 새로이 세워질 나라의 정체(政體)가 될만한 후보군으로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비롯하여 기독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역시 공존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한경직은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야말로 최선이라고 여긴 반면 공산주의를 국가와 교회의 적으로 지목한다.

그렇다면 한경직은 왜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만이 최선이라고 확신한 것일까? 건국이라는 시대적 요청 앞에서 특정한 정체에 대한 선택과 배제에 한경직의 어떠한 지적이고 신학적인 배경이 그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었을까? 곧 기독교적 민주주의를 지지한 한경직의 국가관과 그 방법론으로 제시한 전도입국론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공산주의를 배제한 성경적이고 실존적인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에 따른 전도입국론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본 연구의 주 목적이다.

나아가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한국현대사에서 한국교회와 국가의 관계성이 정초되는 지점을 발견함으로써 앞으로의 방향성 또한 모색하고자 한다. 해방 이전에 일본 군국주의의 압제 아래 통제 당하던 교회는 해방 이후에는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자주적인 교회로 거듭나고자 했다. 이로서 해방을 전후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해방 이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한 한경직의 국가관을 고찰한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국가관의 시원(始原)을 밝히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한경직의 기독교적 민주주의의 선택과 공산주의의 배제는 서북청년단을 추동할만큼 강력한 신학적 담론으로 기능했다. 이는 장차 장로교회라는 교단 차원의 신학을 넘어 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국가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 논란에서 보이듯 한국교회의 국가관은 도전받고 있으며 성찰과 재검토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한경직 연구를 통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시원성의 고찰은 따라서 한국교회가 기존에 유지해오던 반공주의에 기초한 국가관을 재설정할 수 있는 향방을 결정하는데 역사적 맥락과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II. 전도입국론의 역사적 배경

조선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해방을 꿈꾸었겠지만 그 해방은 예기치 않게 도적같이 찾아왔다. 일본과 미국이 벌인 태평양전쟁의 결과에 따라 일본은 패전국이 되고 미국은 승전국이 되었다. 이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해방을 맞이함과 동시에 미국의 통치 아래 예속되었으며 따라서 독립국이 아닌 속국의 지위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백성들은 해방 자체에 감격하며 환호했고 새로운 나라를 꿈꾸어 전국 각지에서 건국운동을 태동시키기 시작했다.

A. 뜻 밖에 찾아온 해방

해방은 우리의 손으로 일궈낸 것이 아니었기에 태평양전쟁이 끝남에 따라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해방군이자 점령군으로 주둔하게 된다. 하지만 해방 직후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外相)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민족지도자들은 찬반을 두고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되어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건국의 주도권을 놓고 숱한 사건사고들이 발행한다. 여기에 더해 1946년 10월의 대구항쟁, 장덕수·여운형·김구 등 민족지도자들의 연이은 피살, 1948년 제주 4.3항쟁과 뒤이어 발생한 여수·순천사건에 이르기까지 해방정국은 그야말로 바람 잘날 없던 질풍노도의 시기가 되었다.

B. 미군정의 성격

38도선 이남에 주둔한 미 8군은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1948년 8월까지 3년간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군정을 앞세운 미국은 중공과 소련 등 공산주의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남한을 민주주의의 보루로 만들고자 했고5) 특히 기독교의 진흥을 통하여 이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한국말에 능통한 것은 물론 남한의 사정을 잘 아는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와 같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행정적 실무를 대신하게 하고 교회를 적극 후원하게 된다. 이를테면 일본의 적산(敵産)인 서울 내 천리교 소유의 부동산을 조선신학교 측에 불하함으로서 영락교회가 창립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C. 민족지도자들의 기독교적 건국론

해방정국의 대표적인 민족지도자들이자 우익 3영수로 불리던 김구, 이승만, 김규식 세 사람은 1945년 11월에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임정요인 환영대회에 참가해 해방을 맞아 조국에 돌아온 감격을 토로함과 더불어 앞으로 만들어갈 나라에 대해 나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들 세 사람은 한 목소리로 기독교적 건국론을 펼쳤다. 우익 3영수의 기독교적 건국론은 해방정국 당시 기독교가 갖는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서, 기독교가 더 이상 외래 종교나 소수의 종교로서가 아니라 건국의 동력이 되어 장차 한국을 책임질 정신적 주춧돌이자 시민 종교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예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익 3영수가 행한 이 연설을 통해 교회 청년들은 물론 교계 지도자들 역시 한껏 고무되어 예배와 설교, 집회와 출판 등을 통해 건국운동에 동참함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 힘을 보태고자 했다. 남한에 있던 교회 지도자들은 대체로 해방된 조국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으나 김창준이나 최문식과 같이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이들 역시 공존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해방정국 당시 기독교계 건국론의 진폭(spectrum)은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III. 전도입국론의 형성

한경직은 1902년 평안남도 평원 간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서구식 근대 교육을 받은 1세대에 속한다. 더욱이 기독교인으로 자랐기 때문에 성리학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지적성장환경이 조성되었다.

A. 민족적 배경: 오산학교와 숭실대학

한경직은 모교회인 자작교회가 운영하는 진광소학교를 졸업한 뒤 투철한 민족교육을 시키는 학교로 소문난 평북 정주에 위치한 오산학교에 진학하여 3년간 중등과정을 수학하며 서북 지역의 기독교 민족주의를 온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특히 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과 교장인 고당 조만식을 만나게 된 이후로 한경직은 두 스승을 일평생 추앙하게 된다. 남강과 고당 두 사람은 모두 서북 지역의 실력양성론을 대표하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로서 개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교육입국(敎育立國)을 꿈꾸던 지도자들이었다.

오산학교에서 한경직이 체득한 실력양성론은 청말 개화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책인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매일 읽고 토론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습 되었다. 한편 실력양성론은 개인적 역량 강화에 치중하여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적 모순에 대처하기에 취약하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곤 했다. 량치차오의 신민론(新民論) 역시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것으로, 결국 민족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사상이었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과 조화되기엔 곤란한 사상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후 숭실대학에 진학한 한경직은 민족보다 교회를 앞세우는 교육을 받는다. 민족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삼은 오산학교와 달리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숭실대학의 학풍은 교회지도자 양성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한경직은 학업에 임하는 와중에도 교내 YMCA 회장을 역임하고 방학 동안 전도대를 결성하여 지방 순회 회중전도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등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민족을 섬기기 위해 과학자가 되기 위하여 화학을 전공하던 한경직은 재학 중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받게 된다. 이에 한경직은 신학을 보다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스승인 블레어(William N. Blair, 방위량)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준비하게 된다. 목회자가 되더라도 한경직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 한다는 정신만큼은 일관되게 간직한 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B. 신학적 배경: 프린스턴 신학교와 폐결핵 투병

1925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한경직은 캔사스 주에 위치한 장로교 계열의 인문대학인 엠포리아 대학(College of Emporia)에 진학하여 철학과 역사 등을 배우며 신학에 입문하기 위한 인문학적 소양을 충실히 쌓게 된다. 1년간의 학부 과정을 통해 영어를 심화시키고 친절하고 따뜻한 미국의 기독교 문화에 적응해가며 한경직은 점차 미국 사회에 연착륙하게 된다. 엠포리아 대학 졸업 이후 한경직은 미국 장로교 신학의 본산인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 진학하여 목회자가 되기 위한 신학적, 목회적인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다.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진행하던 수업을 보면 매 학기마다 성서학과 설교학을 집중적으로 개설하여 설교자와 선교사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경직이 재학하던 1920년대 후반에는 미국 장로교회가 분열되기 직전의 시기로 유럽발 자유주의 신학, 특히 성서고등비평의 수용과 대응 방식 및 교회의 정체성 문제를 놓고 교수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자주 일어나곤 했다.

한경직은 구 프린스턴 신학(old school)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였으며, 신앙의 순수성을 위해 교회의 분열조차 불사하는 그레셤 메이첸(J. Gresham Machen) 교수보다는 교회의 화합을 중시한 찰스 어드만(Charles Erdman) 교수 편에 정서적으로 가까웠다. 하지만 논쟁을 주도하던 양측의 신학자 모두 구 프린스턴 신학을 견지하는 측면에서는 동일했던 바, 곧 신앙고백적 공동체로서 ‘보이는 교회’에 치중하는 가시적 교회론을 고수한다는 입장에서 이들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한경직은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며 교회사를 더욱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박사과정에 진학하고자 했다. 하지만 폐결핵이 발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모든 학업을 중단한 채 뉴멕시코 주의 고산지대로 가서 요양을 하게 된다. 공부는 말할 것도 없고 목회 역시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한경직은 고국에 돌아가 공부한 기간만큼이라도 목회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린다. 서서히 건강을 회복해가면서 한경직은 성 프란체스코와 톨스토이의 책들을 읽게 되었다. 특히 프란체스코에 깊은 감명을 받아 평생 청빈하게 살아가며 약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역에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구제와 봉사를 지향하는 한경직의 목회방향은 이 시기에 구체화되어 향후 보린원을 설립, 운영하기에 이르른다. 프란체스코는 타락한 중세교회를 개혁할 힘을 구제와 봉사로 제시한 인물이었고 톨스토이는 예전과 성사에 경도된 러시아정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메세지에 더욱 집중하라고 역설하던 인물로서, 이 둘을 만남으로 인해 한경직의 장로교 신학은 그 외연을 더욱 넓힐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C. 목회적 배경: 신의주제2교회, 월남과 영락교회

건강을 회복하고 1932년에 귀국한 한경직은 스승인 조만식이 이사장으로 있던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33년, 신의주제2교회의 청빙에 응해 신의주로 올라가 목회에 전념하게 된다. 교회를 새로이 건축하고 부흥기를 맞으며 목회에 전념하던 중 고등비평을 수용한 주석서인 「아빙돈 성경주석(Abingdon Bible Commentary)」의 번역자로 일했다는 이유로 장로교 총회와 한 차례 불화를 겪으며 한경직은 교권 앞에서 더욱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학습하게 된다.

또한 일제가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문제에 관하여 한경직은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건강이 약화되어 감옥에 들어가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들어갈 수는 없었다’고 밝히며 당시의 압제적인 분위기 상 신사참배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증언한다. 이로서 강압적인 정권 앞에서 굴신하게 되는 한경직의 대응방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일제에 의해 신의주제2교회 담임목사직에서 강제 사임을 당한 뒤 교회에서 설립한 보육시설인 보린원에 들어가 원생들과 함께 생활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 직후 한경직은 평안북도 자치위원회에서 일하던 중 소련군이 주둔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공산당에 대적할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공산당의 위협을 피하고자 9월 말에 월남하게 된다. 한경직의 월남한 시점이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통해 벌인 활동 내용과 기간 때문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한경직은 해방정국에서 건국운동을 활발하게 벌인 기독교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 사회민주당의 창당은 윤하영이 주도했고 당 강령은 이유필이 작성한 것에 비해 한경직의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은 점이나 그 활동기간 역시 지나치게 짧은 점으로 보아 한경직을 기독교 건국운동가로 보는 관점은 다소 과장된 해석으로 보인다. 또한 기독교 사회민주당 강령 가운데 토지 및 주요 산업시설 국유화 정책은 사회주의 정책이 아니라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에게서 기원하고 성경에 터한 기독교적 정책이라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월남 직후 미군정에서 잠시 통번역일을 하던 한경직은 친구 김재준과 함께 서울 시내에 산재되어 있던 적산(敵産) 중 하나인 천리교의 재산을 불하받아 기존의 조선신학교를 새로이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경직은 교수의 자리보다 목회의 자리를 우선하던 인물이었다. 결국 한경직은 조선신학교 여자기숙사가 있던 자리인 영락정에서 월남한 이들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오늘날의 영락교회를 일구게 되었다. 한경직의 첫 설교집인 「건국과 기독교」는 바로 고향과 가족을 뒤로 한 채 남쪽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위로하고 동시에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 수립의 당위성을 주장한 설교만을 따로 모아 편집한 것이었다. 이처럼 영락교회 창립 이후로 한경직은 철저하게 목회자로서 자기 자신을 자리매김 시키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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