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설립 40주년 기념 및 내한선교사사전 출간 감사예배
이덕주 교수 ©기독일보DB

양화진문화원은 참배객 100만 명 돌파를 기념해 ‘양화진의 역사와 미래’라는 주제로 제12회 양화진역사강좌를 오는 15일부터 3월 7일까지 매주 목요일 7시 30분 총 4회에 걸쳐 100주년기념교회에서 개최한다.

양화진문화원은 이 강좌를 통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역사부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나누고, 양화진기록관과 양화진홀에서 선교사님의 자료를 기증받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나눌 예정이다.

첫 강좌에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사장인 이덕주 목사(감신대 은퇴교수)가 ‘왜 양화진에 외국인선교사묘원이 생겼나’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다. 이덕주 목사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이 조선이 서양 열강들과 맺은 통상무역조역을 토대로 선교사들의 끈질긴 요청 끝에 마련됐다고 했다.

이 목사는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달리 대외 개방정책을 본격 펼치기 시작했다. 1876년 조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고, 1882년 4월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슈펠트와 조선 전권대사 신헌 사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그 즉시 판사출신 외교관 푸트가 초대 미국 한국공사로 파견됐다”고 했다.

이어 “조약 체결 이후 1883년 고종은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 청년 관료들로 구성된 견미사절단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보냈고 이들은, 한 달 간 미국 정부기관과 각종 근대 시설을 둘러봤다”며 “그러던 중 견미사절단 일행은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가던 기차에서 미감리회 목사이자 볼티모어여자대학 설립자 가우처(J.F. Goucher) 박사를 만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우처 박사는 민영익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 선교 가능성을 파악한 후 1883년 11월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 한국 선교 시작을 제안하며 선교비 2천 달러를 기부했다”고 했다.

이 목사는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매클레이(R.S. Maclay) 선교사는 가우처 박사의 부탁을 받고 조선에 입항해 ‘병원과 학교 설립’을 담은 의향서를 정부에 제출했다”며 “앞서 파견한 견미사절단 보고를 듣고 개방 의지를 더욱 굳혔던 고종은 그해 7월 매클레이 선교사의 의향서를 가납(加納)했다”고 했다.

그는 “이 소식을 들은 미국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는 즉각 행동에 나섰다. 1884년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사역하던 북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이 조선에 도착했다”며 “그는 갑신정변 때 개화파 공격으로 중상을 입은 고종의 처조카 민영익을 살려내 고종의 신임을 얻어, 보수파에 의해 살해당한 개화파 홍영식의 재동 집을 하사 받고 여기서 한국 최초 근대병원인 광혜원(이후 제중원)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어 “북장로회 해외선교부는 교육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의료 선교사 헤론(John W. Heron)을 조선에 파견했다”며 “맥클레이가 속한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도 의료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Wiliam B. Scranton), 교육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미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는 윌리엄 스크랜턴(Wiliam B. Scranton)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을 선발해 조선에 파견했다”고 했다.

아울러 “1885년 4월 조선에 내한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헤론 등 장로교와 감리교 개척 선교사들은 서울 정동에 자리 잡고 의료와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며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 조성은 북장로회 개척 선교사 헤론의 죽음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덕주 목사는 “1885년 6월 알렌이 설립한 제중원에서 의료사역을 시작한 헤론은 1887년 제중원 2대 원장에 부임해 병원 사역을 전담했다. 1888년 고종은 헤론에게 종 2품 가선대부 벼슬을 내렸고, 헤론은 서울 밖 지방에도 자주 나가 환자들을 진료했다”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역에 임한 결과 헤론은 건강이 악화됐고, 그런 상태에서 1890년 7월 지방의 이질 환자를 돌보던 중 이질에 감염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헤론을 간호하던 언더우드, 마펫, 기포드 등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헤론의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그의 별세 이틀 전에 교섭통상사무아무 독판 민종묵에게 조영수호통상조역 규정을 근거로 서울 성과 가까운 외국인 장지 마련을 요청했다”고 했다.

그는 “앞서 영국은 1883년 11월 당시 조선과 체결한 조영수호통상조약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러 조선을 찾은 선교사들을 고려해 ‘조선 당국은 각 통상지역에서 외국인 묘지를 무대가(無代價)로 적당한 지면(地面)을 설정하되 그 묘지는 지대(地代), 지세(地稅) 혹은 기타 수수료 지불을 면제한다. 그리고 묘지 경영은 상기(上記) 조계공사(租界公司)에 위임한다’는 조항을 넣었다”며 “영국의 외국인 묘지에 대한 확보 의지가 반연된 통상조약에 조선은 서울이 아닌 외국인 조계지가 설치된 인천에 외국인 묘지를 조성하도록 허락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인천이 아닌 서울 남대문 남산자락 언덕에 헤론 선교사 장지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고, 조선 정부는 도성과 가깝다는 이유로 이를 계속 거부하는 등 협상이 공회전을 거듭했다”며 “그러다 1890년 7월 27일 민종묵 독판은 선교사들에게 지금의 선교사묘원이 자리한 양화진 나루터 오른쪽 야트막한 언덕을 헤론 선교사 장지로 제시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1890년 7월 28일 오후 양화진 언덕에서 헤론 부인을 비롯해 선교사 가족과 외국공관 직원, 정부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헤론의 두 번째 장례식이 거행됐다”며 “당시 헤론의 임종을 지켜봤던 평양신학교 설립자 마펫(Samuel A. Maffett) 선교사는 본국 선교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고 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첫 무덤의 주인공(헤론)은 한국 백상을 위해 생명을 바친 선교사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한국인들의 엄청난 애도,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였던 그와 부인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애정과 존경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쓸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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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방문한 참배객들. ©기독일보DB

이덕주 목사는 “헤론이 묻힌 양화진 땅의 원 소유주는 합정리 계동에 거주하던 김성옥이었다”며 “조선 정부가 나서 그가 소유하던 양화진 일대 2,700평 부지를 인천 세관이 비축해 뒀던 조가(租價)로 매입했다. 헤론 선교사의 장례식 거행 이후 매매가 끝난 그해 8월부터 양화진은 외국인 묘역으로 확정된 것”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1893년 무렵 선교사와 외국 공사관 대표, 서울주재 외국인 대표들이 참여해 구성된 외국묘지협회는 1905년 양화진 주변 땅을 더 구입해 4천 평 규모로 묘역을 확장했다”며 “그리고 1913년 외국인묘지협회는 ‘경성구미인묘지회’란 이름으로 조선 총독부에 법인등록을 마쳤다. 이 단체는 1985년 재단법인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협의회로 소유권을 이양하기까지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운영 주체로 활동했다”고 했다.

그는 “1910년 영국 구세군 선교사로 내한해 일제강점기 경성구미인묘지회 책임자로 활동한 토마스 홉스(Thomas Hobbs) 선교사는 1931년 11월 ‘The Korea Mission Field’에 양화진 외국인묘지 역사와 현황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다”고 했다.

이어 “홉스 선교사는 이 글의 서두에서 창세기 23장 즉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의 시신을 묻을 묘지로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막벨라 동굴과 그 텃밭을 사들이는 내용으로 시작했다”며 “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대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이해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홉스 등 선교사들은 헤론의 죽음으로 얻게 된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아브라함의 막벨라 동굴에 비유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은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막벨라 동굴 매입으로 본 것처럼, 양화진 묘역에 조선 땅을 밟은 선교사들이 묻힘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여겼다”고 했다.

이덕주 목사는 “그런 의미에서 양화진 묘역은 ‘조선의 막벨라’란 칭호를 받을 만 하다.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반도와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길 꿈꾼 것”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은 1890년 헤론 선교사를 필두로 2004년 4월 별세해 유언에 따라 이곳에 안장된 언더우드 2세(Underwood, Horace G.Ⅱ, 연세대 교수·새문안교회 장로 역임)를 끝으로 132명이 안장됐다”며 “이름과 무덤 위치를 알 수 없는 선교사들 자녀들까지 포함하면 양화진에 안장된 선교사 가족은 15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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