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예수님은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고, 형제의 잘못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으며,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권면했다. 한마디로 이웃에 대한 관용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런데 작금 세상에선 기독교 신자들이 오히려 관용에 아주 인색한 배타적 독선적 편협한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있다. 동성애와 낙태 등에서 성경적 윤리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막상 그 당사자들의 어려운 형편을 돌보지 않는 냉혈한이 되어버렸다. 정치적 이슈에서도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무상분배를 반대하는 보수꼴통으로, 북한과의 대화는 물론 도움까지 단절해야 한다는 반민족주의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반면에 타종교인 및 불신자들은 동성애자, 여성, 빈민, 노동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모든 이를 그 죄와 허물과 무관하게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에 대해서도 정의로운 전쟁보다는 치사한 평화가 더 옳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신자들보다 훨씬 사랑이 많은 의인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신자가 이 주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분명히 성경의 진리는 자기들 편이라고 믿고 또 그 진리를 앞세워 강조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려운 사람들을 방치하는 모습이 되었다. 거기다 성경 진리와 무관한 쪽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더 많이 베풀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신앙연륜이 깊은 신자들마저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성경적 방안이 어떤 것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신자는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서 ‘화목’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분의 원수에서 그분의 자녀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인간들 사이의 화평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자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그분의 사랑을 받아 누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미 구원 얻은 신자들에게는 아직도 사탄에 미혹된 영혼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는 직책이 맡겨졌다.

주목할 것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함께 부탁하셨다는 점이다. 사람들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방안을 뜻한다. 불신자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되 성경의 진리에 근거해서 하라는 것이다. 당연히 동성애와 낙태는 죄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 너무나 명확하게 선언했음에도 쉽게 간과해버리는 내용이 하나 있다. 무엇인가? 그 말씀은 반드시 “그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화목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앞에서 어떤 말씀이 있었는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자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않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강조했다.(15,16절) 이 서신의 저자 바울조차 예수님을 처음에는 그렇게 알았지만 도리어 예수님은 그와 신자들을 절대로 외모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라면 그 자격 능력 성품 행위 어느 것도 문제 삼지 않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 하신다는” 의미다.

그럼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주 간단하다. 성경 말씀대로만 하면 된다. 동성애자 낙태하는 자 심지어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공산주의자나 기독교인을 말살하려는 극단 테러리스트들의 죄를 묻지 말고 단순히 복음만 전하면 된다. 왜냐 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전에는 자신들의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꾸 그들에게 죄를 물으면 지금 우리 모두가 경험하듯이 반발만 사지 않겠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동성애가 낙태가 죄가 아니라든지 그에 대해 침묵하거나 성경의 진리를 타협 수정 왜곡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 반대로 그들로 그것들이 죄임을 깊이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복음부터 먼저 전해야 한다.

예수님이 화평케 하는 자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마5:9)도 같은 뜻이다. 단순히 인간관계를 잘 유지해서 모든 이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특별히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잘 조정해 화해시키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도 가능하고 또 그런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해줄 리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따라서 해야만 그런 칭호를 얻는 것이다.

바로 자기가 십자가 안에서 죽고 남들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는 자이다. 넓게는 산상수훈 전체가, 좁게는 팔복강화가 천국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미 천국 영생을 보장 받은 자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규범이다. 예수 십자가 사랑으로 먼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또 그 십자가 사랑으로 사람들 사이를 화평케 하라는 것이다.

인간사에서 하나님을 제외시키면, 특별히 성경의 하나님을 배제한 채 만사를 보면 죄가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 사이의 화목을 깨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 사이 화목하게 만드는 것이 최고 우선적이고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선이 된다. 필연적으로 동성애와 낙태가 죄라고 말하는 신자들이 도리어 그들에겐 큰 죄인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이런 판국에 무엇이 더 급한 일인가? 당연히 그들로 성경의 하나님을 먼저 알게 하는 즉, 그분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끝까지 성경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어쩔 수 없다. 성경 진리를 왜곡해가며 그들을 기독교 안으로 포용할 수는 절대 없다. 또 성경이 그러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이 단계에서 분명히 해둘 사항이 하나 있다. 신자가 비록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 밖에, 그것도 일시적으로 두지만 신자 자신은 그들을 진정으로 계속해서 사랑해야 한다. 열심히 전한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고 동성애와 낙태 등의 죄를 계속 범하는 죄인이므로 미워해도 되고 아예 관심을 끊어야 한다는 법은 절대 없다. 끝까지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그런 사랑이 없으면 사실은 처음부터 전도를 해서도 안 된다.

지금껏 신자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우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렸다. 이는 화목케 하는 말씀이 아니기에 화목케 하는 직책을 잘못 수행한 것이다. 신자들은 불신자들을 구원과 심판으로 나눌 수 있는 기준을 가졌기에 얼마든지 그것을 실행해도 되는 양 행세하며 편 가름하기 바빴다. 그것도 동성애자라는 특정 죄인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말이다. 그마저도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끝까지 돌보아 고쳐주려 그랬다면 하나님께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다.

예수 십자가의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려면 상대를 절대로 육체대로 알아선 안 된다. 진정으로 그 죄인을 불쌍하고 안타깝게 생각해야 한다. 복음을 모르는 자를 세상 지위 재물 권세와 상관없이 가장 가난하다고 여겨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이에게 공평하고 풍성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전할 수 있다.

신자가 전하는 내용이 사랑인데 사랑의 실천 없이 어떻게 전해질 수 있겠는가? 그래도 된다거나 얼마든지 복음 자체 능력이 나타난다고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못해 하나님 앞에 큰 교만이다. 사랑은 없이 신자들이 마치 심판과 구원을 나누는 것처럼 행동하니까, 아니 실제로 일부 교인들이 일부 죄인들을 아예 냉정하게 배척하니까 지금 같은 평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불신자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직책만 수행하면 된다. 사람 사이 화목은 차후의 일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진정한 사람 사이의 화목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먼저 화목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다.

그리고 그 화목케 하는 직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길은 법 규정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정치적 방안도 아니요, 전도에만 열심을 내어서 기독교 교세를 늘리는 종교적 방안도 아니다. 오로지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십자가 복음만 순전히 전해야 한다. 또 그 상대를 더더욱 끝까지 용서하며 사랑해야 한다.

반드시 신자가 알아야 할 사항이 하나 더 남았다. 어떤 죄인이든, 대표적으로 동성애자의 경우는 더더욱 하나님을 먼저 제대로 알아야만 실제로 그 당사자가 살아나는 가장 선한, 아니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차후에 상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상기에 인용한 바울사도의 권면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도 없다. 그리스도 없이는 불신 죄인들과 하나님의 화목은 아예 불가능하고 또 그래서 그분의 사랑도 전혀 받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을 살리려면 바꿔 말해,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 복음만 전해야 한다. 또 그 복음이 생명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 사랑으로 끝까지 섬겨야 한다. 만약 죄를 그들에게 돌리려면 복음을 전하는 자부터 죄에서 완전히 깨끗해야만 설득력이 있는데 도무지 그럴 수 있는 자는 단 한명도 없지 않는가? 그러니 더욱 십자가 복음만 전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신자가 모든 미혹된 영혼에게 이렇게 한다면 과연 지금처럼 기독교인이 편협하고도 냉정한 종교인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겠는가? 더 중요하게는 신자 자신이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곤혹스러워질 이유도 필요도 전혀 없지 않는가? 신자는 때를 얻든 못 얻든 예수님 사랑을 전하고 그 사랑을 실제로 이웃사이에 실현해야 한다. 이 일 외에 신자가 따로 행할 일은 전혀 없다. 그럴 시간과 여유도 없다. 쉽게 말해 복음을 전하는 자가 죽던지, 전함을 받는 자가 죽던지 그 때까지 중단 없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2017/8/17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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