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그러므로 당신들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마소서 그들은 거짓을 예언함이니이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리니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멸망하리라.”(렘27:14,15)

완벽한 하나님의 섭리

원죄로 타락하긴 했어도 사람은 의외로 의롭게 행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별히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 구차하게 항복하여 목숨을 연명하는 것은 너무 비겁하고 또 적국의 노예가 되어 수모 멸시 당하느니 끝까지 결사 항전하겠다고 나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종일관 유다더러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확정되어 있기에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호소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죄에 대한 심판을 해야 했지만 당신 백성들을 향한 당신만의 긍휼의 여지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보존 번성시키는 것은 결코 구차하지 않으며 도리어 숭고한 일입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래야만 망했던 유다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본문의 결론(22절)에도 하나님은 그런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성전의 기구들이 비록 바벨론으로 옮겨지겠지만 오히려 그것들을 잘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노예 살이 했던 것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창성케 하는 하나님만의 방식이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성전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성전기물도 다 탈취해 가겠지만 때가 되면 여호와가 반드시 되돌려 받게 해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당장의 인간적 생각으로는 빼앗기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 빼앗겼다가 다시 찾는 방식은 불합리하고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완벽한 섭리가 아닌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실제로 에스라서 1:7에 바사왕 고레스가 예루살렘에서 탈취했던 여호와의 전의 기구들을 모두 챙겨서 귀환하라는 칙명을 내림으로써 본문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대변하는 자는 예레미야 혼자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항복하지 않는 것이 의롭다고 결연하게 선언합니다. 백성들의 호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또 이전에 빼앗겼던 성건 기물들을 지금이라도 다시 찾아 올 수 있다고까지 예언했습니다.(16절) 예레미야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예언이니 백성들이 더 따랐습니다. 저라도 당시 유다 백성이었다면 예레미야는 배척하고 다른 선지자들을 추종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지금 예루살렘에 그나마 남아 있는 성전 기물을 귀하게 여기고 더 이상 빼앗기지 않으려면 성전에 모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촉구했습니다.(18절) 그러지 않으면 그마저도 빼앗길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22절) 또 이미 빼앗긴 것들을 당장 되돌릴 수 있다는 다른 선지자들의 큰소리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백성들의 미움을 더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양쪽 다 성전기물을 지킬 수 있다는 예언을 했습니다. 백성들이 어느 쪽을 따를지 잠시나마 당혹될 이유도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에 다수가 가는 쪽을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또 지금 현재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장해주는 쪽을 선호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가지 영적인 공식

그런데 주지할 사항은 무조건 거짓 선지자들을 악하다고 매도해선 안 됩니다. 당시의 국가적 위기 상황을 감안하면 그들에게 애국심이 없었을 리는 없습니다. 그들도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했고 여호와를 열심히 믿고 따랐습니다.

예레미야와의 유일한 차이는 15절이 말하는 대로 여호와께 받은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예언은 성령의 음성으로 계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꿔 말해 인간적 생각이 더 많았거나 앞섰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항상 인간의 의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치스런 항복보다는 의로운 항전이 옳다고 예언한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당신의 선민이자 언약 백성더러 그런 수치를 당하게 가만 놓아둘 리가 없다고 섣불리 판단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당신께서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당신의 백성에게도 반드시 선한 일을 할 것이라는 단순한 공식에만 대입한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믿는 바대로 하나님은 이뤄주신다는 적극적 신앙을 그때부터 강조했을지도 모릅니다. 백성들을 그렇게 고무 격려하면 바벨론을 대적할 힘도 자연히 키우게 되므로 나쁠 것 없다고 단순히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의 메시지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소망, 계획, 신념에 불과했습니다. 당장에 자기 생각에 옳거나 좋아 보이는 방안을 채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난 역사 동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간섭했었는지에 대한 검토나 묵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과거에서 먼 미래에까지 관통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일관된 원칙에 따릅니다. 과거를 보면 그분의 미래 행보도 추정이 가능해집니다.

사사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면 반드시 칼 기근 염병(13절) 같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선하시므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선한 일만 베푸신다는 단순한 공식만으로는 부족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다른 영적 공식이 필요하고 실제 역사에선 더 많이 자주 실현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징계를 멈추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는 우상숭배의 죄만 범하지 않으면 칼, 기근, 염병의 형벌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신 백성을 향한 당신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세우는 것만이 그분의 참 된 의입니다.

지금 유다에 국가적 위기가 닥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그럼 진심으로 우상숭배에서 되돌아서면 그 형벌을 당장이라도 중지 취소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지금이라도 더 이상 형벌이 진행되지 않도록 성전에 모여서 회개하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가 당장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빼앗긴 성전 기물까지 되돌려 받게 해줄 것이라고만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선한 것만 주신다는 첫째 영적원리만 붙들고서 백성들의 인기만 얻으려 듭니다.

방정식의 X 값을 찾으라

이 두 영적 원리를 수학공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니까 당신의 백성에게 선한 일만 허락하신다는 첫째 원리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같은 네 가지 기본 연산(演算)에 해당됩니다. 구구단만 알면 그대로 대입해서 누구나 쉽게 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고난의 연단을 허락하더라도 거룩하게 세우길 원하고 그것이 그분의 선이라는 것이 둘째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왜 당신의 선민에게 이런 고통까지 허락하는지 그 뜻을 당장에는 알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푸는 네 연산과 달리 이차 삼차 방정식에서 미지의 X 값을 계산해내어야만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쉽게 떠오르는 자기 생각으로만 판단했습니다. 유다가 처한 위기를 단순히 네 가지 연산에만 의존해서 해석했습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방정식의 미지수를 풀어내듯이 찾아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애국심과 신앙심은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오래 동안 애끓는 심정을 갖고 간절히 엎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장의 사람들 반응에만 신경을 쓴 것입니다. 유다왕국의 역사만 잠시 되돌아봐도 되는데 그마저 등한히 했습니다. 자기를 하나님보다 위에 세우려는 인간적인 본성에 묶인 채 자기 생각만으로 말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고 가르쳐야 할 선지자가 오히려 백성들 수준으로 낮아졌습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정말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다섯 왕을 섬기면서 모든 유다 인들로부터 멸시 비방 박해 당했습니다. 그렇게 당하는 개인적인 고통 때문에라도 하나님 앞에 매일 매순간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진심으로 걱정했습니다. 그런 선지자에게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가 성령의 미세한 음성을 직접 들었는데 어찌 그대로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계시라고 해서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거스르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영적 진리는 일관되고 오히려 쉽습니다. 유다의 지난 역사만 회상해도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국제정세만 이성적으로 따져 봐도 차라리 항복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시가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단번에 모든 것을 훤히 알게 해주시는 법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매일 꾸준히 교제하길 원하십니다. 그분은 지속적이면서 신실한 관계를 더욱 소원하시고 기뻐하시기에 신자도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분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연약합니다. 한 걸음씩 걸음마 하듯이 그분의 이끌음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형편에 맞춰 일상의 삶에서 한 번에 한 번씩만 인도하십니다.

믿음이란 눈앞에 당장 보이는 일로 좌우되지 않는 실력입니다. 오랜 기간 성실하게 그분의 인도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쉬지 말고 그분 앞에 진심으로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불신 세상을 향해 그처럼 하나님의 대언자로 얼마든지 설 수 있습니다.

2018/10/20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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