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20~21)

1. 영화에 대한 성경의 증언들

알다시피 영화란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를 일컫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그동안 죽은 모든 신자의 육체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어 그들의 영혼과 결합하게 하고, 살아 있는 모든 신자의 경우엔 육체를 변화시켜 모든 신자가 동시에 그리스도와 같은 완전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즐비합니다. 무엇보다 영화와 육체의 부활에 대한 가장 상세한 성경구절은 고전 15:12~58의 말씀입니다. 먼저 22~2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5~50절에서 부활한 육체의 본질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다루는데 이것은 좀 있다가 다룰 것입니다. 나머지 구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살아남아 있는 자들에 관한 것으로 그들은 재림의 순간에 더 이상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부활의 새로운 몸으로 순식간에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의 진술도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이미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 떠난 자들의 영혼은 그날 다시 돌아와 그들의 육체와 결합하도록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데려오시리라고 했습니다. 또 4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오게 하리라는 사실만 강조할 뿐 아니라(14절)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리라는 사실도 강조하면서(16절), 그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져 주를 영접할 것이라 말합니다(17절).

사도 요한도 영화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어떤 이들은 구약 성경에는 영화, 즉 장차 있을 부활의 육체에 대한 소망을 언급한 부분이 전혀 없거나 아니면 거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도 영화에 관한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욥은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서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5~26)고 했습니다.

시편과 잠언에도 말씀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 49:15)

“아이를 훈계치 아니치 말라...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 23:13~14)

선지자들의 말씀도 있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육체들은 일어나리이다”(사 26:19)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또 구약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히브리서에도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11장 10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했습니다.

또 많은 구약의 성도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고 했습니다.

나아가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19절) 생각했다고 증거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부활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오셔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시자 마르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3~24). 이런 대답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계속)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