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모 교수
류현모 교수

영국에서는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때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Someone was born with silver spoon in one’s mouth)”라고 표현한다. 부유한 집안은 은식기를 사용 한데서 유래한 것 같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금수저와 흙수저”를 대비해서 사용하는 것은 태어난 배경의 차이에 대한 영국식 부러움의 표현을 훨씬 더 과장하여 유복한 배경의 사람을 공격하면서 자기 처지에 대한 불평을 정당화하려는 심리가 반영된 것 같다.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부여받는 출발선부터의 차이를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토기장에 비유하며 우리 각 사람을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드실 권한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유복함”의 뜻을 경제적 혹은 사회계층의 측면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부유하지만 가족 간의 싸움이 치열한 집안은 어떤가? 부유하지만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경우는 어떤가?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가 갖지 못한 것만 과장해서 평가할 때 모두 자신이 상대적으로 유복하지 못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각각 독특하게 창조하셨다. 모든 사람의 삶이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도록 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의 삶에 다른 목적을 부여하셨다. 토기장이는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이라는 목적 아래 같은 흙으로 여러 그릇을 빚어낸다. 천하게 쓰일 것인지, 귀하게 쓰일 것인지 피조물인 우리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질문하면서, 그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록 유복하게 시작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결국은 귀히 사용되는 정결한 그릇이 될 수 있다.

 성경은 세상의 권세가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 혹은 다른 신을 섬기라는 명령을 제외하고 비록 악한 권세라 할지라도 그 명령에 복종하라고 말한다(롬 13:1). 예수님은 로마의 식민지 총독과 그 관리들의 권세에 순종했다. 세금을 바쳐야 할 곳에는 세금을, 관세를 바쳐야 할 곳에는 관세를 바치라고 하셨다. 성경은 모든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권위에 복종할 것을 명한다. 하나님이 그 권세에 칼을 부여한 것은 권위에 불순종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을 처벌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라는 뜻이다. 이는 다수의 사람이 하나님이 명하신 창조 사역에 임할 수 있는 창조 질서의 유지를 의미한다.

지난 수년간 여러 차례 반복되었던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탑승 시위를 바라보며 그들의 불편함에 동의가 되면서도 출퇴근 길의 교통을 볼모로 한 시위의 방법에는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전장연은 특별교통수단 271억을 증액하는 예산안만 국회에서 통과시키면 지하철 탑승 시위를 멈추겠다고 한다. 이는 국민의 세금 사용에 대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발달 장애 어린이를 위한 학교 건설, 교통사고에서 회복 중인 장애인의 재활 시설 확충, 정신질환 청소년을 위한 교육 및 돌봄 시설, 치매 노인을 위한 요양 및 돌봄 시설, 등 국가 예산배정을 요구하는 많은 사업이 모두 그 시급성과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지하철 탑승 지연 시위는 약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불법적으로 시위해도 정당하다는 PC(정치적 정당성) 주의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국가 예산 사용의 배분 문제는 대부분은 제로섬 게임이다. 누군가가 더 많이 가져가면 다른 편에 더 소외되는 사람이 있기에 정중하게 요청하고 자기주장의 당위성을 간곡히 설득해야 한다.

국가 예산이 넉넉해서 모든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길 바라지만, 세금 부담이 증가하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업에 더 많은 세금을 부담시키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익이 줄어드는 기업에 누가 투자할 것이며, 세금을 더 내기 위해 고용이 줄어들거나 임금이 삭감되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실패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선택했던 그 길을 택하자는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태어날 때 혹은 삶 가운데 부여하신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세상의 모든 불평등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불평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의 형편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대기업 노조원들이 노조에도 속할 수조차 없는 비정규직 직원들과 함께 정의롭게 같이 잘 살자고 주장하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하듯 위의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세금을 내야 할 곳에 세금을 내고, 세금으로 형성된 공적자금이 정의롭게 배분되도록 의견을 표해야 한다. 덧붙여 예수님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웃이 될 것을 요청하신다. 국가, 지자체, 교회의 손길조차 닿기 힘든 더 낮은 곳으로 우리의 손길을 흘려보내는 것이 성경적 정의이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비교와 불평은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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