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예배와 삶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제사를 드리는 처소였다. 그런데 예수 당시 성전은 율법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이 속죄를 위하여 타성적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사고 파는 종교적 장사터로 변모하였다. 예수는 이 사실을 보고 진노하셨고 동물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테이블을 뒤엎으시면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이다.

I. 구약의 성전: 가시적 성전

구약 출애굽 광야시절에서는 하나님은 이동식 성전인 성막(聖幕, tabernacle)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셨다. 성막의 지성소는 하나님 임재의 처소였고, 가장 거룩하였다. 성소에서는 속죄물을 바침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속(贖)함을 받았다. 지성소(至聖所, sanctum sanctorum)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였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진설(陳設)되었다. 성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모세는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만났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후에는 솔로몬 왕에 이르러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되었다. 이 솔로몬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이 성전은 바벨론(Babylon)제국에 의하여 훼파되고 하나님의 전(殿)의 집기들은 바벨론으로 옮겨가게 된다. 구약의 역사서인 역대하서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대하 36:5-7). 그리고 다니엘서 서문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殿)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단 1:1-2). 그리하여 무너진 성전은 70년 후에 에스라와 학개와 스룹바벨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복구되고, 헤롯 시대에 와서 성전은 다시 확장 신축된다.

II. 성전을 정화하심: 요한복음의 기록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복음서 앞부분에 예수의 성전을 정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복음서 끝부분에 기록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정화가 가나 혼인 잔치와 같이 복음서 서두에 놓여 있다. 여기에는 성전 되신 예수의 메시아성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편집 의도가 부각되어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 절기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신다. 성전은 내뜰과 외뜰이 있다. 외뜰은 내뜰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이방인 방문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경배하러온 이방인 경외자들은 외뜰에서 경배해야만 했다. 이방인 경외자들은 방문시 히브리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도록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언하였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어지게 될 것이다”(사 56:7).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종교적 장사터로 변모되어갔다. 짐승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희생제물로 사용되었다. 짐승들은 제사드리는 자들에게 상품처럼 팔렸다. 그런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전(殿)은 장사터로 변모된다. 외뜰이 팔리는 짐승으로 채워져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공간까지 빼앗았다. 성전은 경건의 영과 헌신의 정신 없이 단지 형식적인 율법적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각종 번제물을 사고 파는 장사터로 변모한 것이다.

예수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다”(요 2:14-15). 그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신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성전부패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성전에서 일과를 수행하는 일반 제사장들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지도급 제사장 가문이었다.(에녹1서, 모세의 유언 5:3-6:1)

예수의 성전 정화 행위는 헤롯 성전 뜰의 남단에 위치한 주랑(Royal Portico) 가까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전 예배에는 순결한 비둘기와 동물이 필요했다. 환전상들은 성전세를 지불하려는 자들에게 두로 세겔(Tyrian Shekel)로 환전해 주었다. 두로 세겔은 비록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상징을 담고 있기는 했지만 최고의 품질과 함께 은의 함량도 가장 높았다. 두로 세겔은 오늘날 미국 달러(dollar)처럼 당시 구할 수 있는 가장 잘 통용된 주화(鑄貨)였다.

성전을 정화하신 이러한 예수의 행위를 요한은 다음같이 해석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요한과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이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의 행위가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한 고발거리를 제공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이 와서 성전을 정화할 시(時) 예수가 한 말을 고발하고 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 유대인들에 의하면 이들은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손상하는 것이며, 참람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였던 예수가 성전을 정화하신 행위는 그의 메시아 의식에서 바르게 조명될 수 있다.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상징적인 메시아 행위(symbolic Messianic action)였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시에 하신 말씀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만에 짓겠다”-는 나중에 예수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성전 모독의 죄목으로 고발된다.

III. 성전 정화의 권위는 예수의 메시아 되심에서 나옴

유대인들은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의 행위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이에 대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에게 그가 어디서 그런 일을 행하는 권셰를 받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메시아 의식과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변두리 지역인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에 불과한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한 것은 그의 메시아적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성전 정화 행위는 선지자적 표적(表蹟, wonder) 행위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구약의 전통에서 이사야나 에스겔 등 예언자들에게서 타락한 제의(祭儀)에 대한 비판적 예언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랍비 예수가 몸소 채찍을 들고 성전을 정화하였다는 것은 예언자적 비판을 넘어선 나사렛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행위이다. 이것은 메시아적 표적 행위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을 다음같이 표현하고 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라는 구약의 수난 시편 69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장사터로 변한 성전의 불결해진 모습을 보면서 성전 자체가 되시는 자신의 몸을 청결케 하여야 한다는 성전(聖殿)사모의 열정을 표출한 것이다. 예수의 인성이 그 안에 계시는 신성을 표출한 것이다.

예수는 그의 몸인 새로운 영적 성전을 지으시기 위하여 돌로 지어지고 의식(儀式)으로 집전되는 옛 성전을 허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말씀에는 그의 메시아적 사역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 성전에서 사고 파는 행위를 금지한 이유는 당시 성전 제사가 타락한 것을 지적할 뿐 아니라 성전 제사가 자신이 몸으로 드릴 종말론적 제사에 의하여 능가될 것을 예표하신 것이다. 또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짓겠노라”는 예수의 말씀은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촉발하게 하는 의도가 담겨있는 말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고 이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종말론적으로 성취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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