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에게 명하신 말씀을 내가 오늘 너희에게 전하였어도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가서 머물려고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줄 분명히 알지니라.”(예레미야 42:20~22)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이스라엘

남왕국 유다는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마지막 시드기야 왕은 자기 아들들이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후에 정복자들로부터 자기 두 눈마저 빠지는 형벌을 받고는 장님이 되어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의 망막과 뇌리에 마지막으로 기억된 것은 자식들의 참혹한 죽음이었고 그 후로 어떤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지난 십년 간 하나님의 메시지에는 눈과 귀를 가린 채 사람들의 눈치만 봐왔던 자의 최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정미하고 엄위한지 모릅니다.

유다 땅에 남은 자들은 예레미야더러 기도하여 여호와의 뜻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렘42:2) 애굽 땅으로 가야할지 가나안 땅에 남아있어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지자는 애굽으로 가면 칼과 기근이 따라가서 그곳에서도 벌을 받을 것이니 가나안 땅에 남으라고 전해주었습니다. (15,16절)

백성들이 그렇게 물은 나름의 이유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 동안 친 애굽 성향을 보였기에 정복자 바벨론이 괴롭히지 않겠는지 염려되어 차라리 애굽으로 도망가 살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아무 소유 없는 빈민에게 유대 땅의 당시 부자나 귀족이 소유하는 포도원과 중산층이 가진 밭들을 무상으로 나눠줬습니다.(39:10) 오히려 대우를 잘해주며 유화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럼에도 애굽으로 도망간다면 역으로 그들의 호의를 무시한 꼴로 바벨론의 화를 더 돋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벨론은 계속해서 서진정책을 고수할 것이며 당시에도 패권국가가 둘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애굽을 정복할 야망을 항상 키워왔기에 애굽을 침공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습니다. 국제정세 전문가가 아니라도 상식적 이성만으로 충분히 분별이 가능했던 일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와서 기도 부탁한 이유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말도 안 되는 계시를 오래 동안 일관되게 전했지만 결국은 그 예언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벨론 왕도 그를 선대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신뢰했어야만 합니다.

선지자는 바벨론에 항복하는 메시지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밭을 미리 사놓으라고까지 권했습니다. 이 땅에 남아 있어도 하나님은 보호 인도하신다는 확증적인 보장이었습니다. 바벨론도 정복자로서 식민지에 독재통치를 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겠지만 히브리인들을 백분 활용해야지 죽여 봐야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거역합니다. 인간, 아니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어떻게 이리 완악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표현했지만 그마저 크게 부족합니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기도 부탁을 할 때에 여호와의 응답이 좋든 안 좋든 순종하겠다고 다짐했고 순종해야 복이 따른다고 고백까지 했습니다.(42:6) 그럼 하나님에게 서원한 것이지 예레미야에게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행태는 해도 해도 너무 심합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 쪽에선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판입니다.

사탄에게 영혼을 판 이스라엘

그렇게 거역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자기들 마음의 소원과 계획은 이미 애굽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그래서 구역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대목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강조하는 메시지는 출애굽 시킨 여호와 하나님 당신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속 되풀이해서 선언하셨는데 애굽으로 절대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그저 조금만 불편하면 돌아가려 했고, 최소한 그리워했습니다. 사백 년간 노예로 살았던 근성이 DNA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만 보장된다면 단순히 시키는 대로 하는 것만큼 편한 일이 없습니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집행하느라 골치 썩는 일이 없기에 거의 놀고먹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애굽도 최대한의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고기와 수박 같은 별식을 먹였고 우상신전에서 음란한 쾌락도 제공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에겐 공동체가 결성된 이후 처음 거주했던 애굽 땅이 고향 같았을 것입니다.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가나안이나 우상숭배로 타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경제적 군사적으로는 바벨론이 떠오르는 태양이고 애굽은 지는 해인데도 애굽이 좋다고 하니 그런 이유 말고는 설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애굽으로 절대 돌아가지 말라고 명했기에 그렇게 하면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이 원하는 것 듣기 좋은 것만 골라서 들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셔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니 여호와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부모한테도 그러지 않는데 하나님께 그랬습니다.

이들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애굽이 조금 더 안전해 보이기보다는 지금 당장 바벨론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더 싫고 자존심이 상했던 것입니다. 거기다 여전히 남아 있는 애굽 혼혈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했을 수 있습니다.(민11:4) 어쨌든 그들에게 애굽은 끝까지 그들을 하나님 반대쪽으로 끌고 가서 가두는 견고한 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에서 엄청난 열 재앙의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들어가면 다 죽는 광야에서도 안전히 보호해주었습니다. 바벨론에서도 보호하고 포로귀환까지 약속했습니다. 애굽이든 가나안 땅이든 바벨론이든 어디에나 여호와만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분으로부터 예레미야는 계시를 받아 예언했고 예언한 그대로 이뤄졌습니다.

지금도 선지자가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데도 자기들 생각과 다르다고 순종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제사장들은 사람들의 소원대로만 신탁하고 기도해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예레미야를 그런 우상 주술사 취급을 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 여호와를 바알이나 앗세라 수준으로 비하시키는 셈입니다. 당장에 안락과 풍요만 보장되면 사탄에게도 자기 영혼을 팔려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팔려진 상태입니다. 인간 본성이 타락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내가 복음"으로 큐티하는 신자들

지금 유다 백성들만 탓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로 아주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아주 닮은 점들을 크게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목사와 상담하러 올 때에 실은 미리 자기 가야할 길을 정해 놓고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그러려니 뭔가 미진한 점이 있어서 목사가 인정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느끼는 도덕적 종교적 부담감 내지 죄책감을 없애서 바로 시행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질문의 양식도 이런 저런 일을 해도 되는가라고 묻습니다. 벌써 그렇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자기도 허물과 잘못이 내포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냥 하지 않으면 됩니다. 목사도 신자와 성정이 동일하되 성경만 조금 더 많이 알 뿐입니다. 이젠 신자에게도 성령이 내주해 있고 기도할 수 있기에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읽으면 됩니다.

목사의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어떤 일을 해도 되는지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은 물론 자신이 거룩해지는 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만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에 하나님을 이용하려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많은 신자들이 아침마다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서 흔히 말하듯이 “내가 복음”을 작성합니다. 본문의 뜻을 앞뒤 전체 문맥에서의 찾지 않습니다. 듣고 싶은 말만 골라 읽습니다. 주로 고난과 실망을 털어내는 위로 격려 승리의 문구에 주목합니다. 단순히 생각과 감정을 조금 추스르는 것은 마인드 컨트롤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과 함께 경건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고 따르겠나이다.”라는 기도부터 성경을 묵상하기 전에 순전하고 진실한 믿음으로 드려야합니다. 자신을 예수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낮추어서 그분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은 큐티는 단순한 종교적 요식행위에 불과해집니다. 그러니까 큐티를 하루라도 빠트리면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나 두려워합니다. 그분을 율법적 하나님으로 격하시킵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묵상하여 자기 삶에 적용해야만 합니다.

셋째로 같은 맥락으로 기도하면서 내 뜻이 내가 원하는 시기와 방식으로 이뤄져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유대인들과 하나 다르지 않고 똑 같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아는 영적인 천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직통 계시도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기도하든 응답을 얻을 때까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뜻이 그분의 뜻과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란 어리석은 우리가 완전하신 그분의 뜻을 알아가며 내가 원하는 것을 수정 포기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바로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일이 됩니다. 종교적 큰 과업을 찾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일차적으로 맞추었고 또 그대로 실현될 것이므로 그것이 바로 그분의 나라 아닙니까?

이 세 잘못은 결국은 하나로 통일되는데 죄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기의 길, 그것도 편안하면서도 출세 형통으로 나아가는 길만 추구하려는 끈질기고 뿌리 깊은 성향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내 소망과 계획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만 고집하면서 내 길 쪽으로만 뻗어져 있는 생각의 뿌리를 잘라내는 실력입니다. 나를 주님 뜻대로 사용하여 주시옵소라고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기꺼이 고백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입니다.

그러지 못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20절에서 너희 마음을 속였다고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를 뜻이 전혀 없으면서도 말로만 그렇게 예레미야를 속였는데 하나님을 속인 셈입니다. 돈과 하나님 중에 실은 돈을 주인으로 모시면서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매순간 가장 먼저 내 마음을 속이지나 않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2018/11/17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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