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3. 십자가의 삶은 어떤 삶인가요?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회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입니다. 만일 십자가를 회피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 조상의 신앙을 포기하고 기독교를 부정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 입에서 나오는 구원이라는 단어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십자가에서 떠난다면 그 능력이 우리에게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자연적인 상태에서 지내다 소멸해 갈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십자가는 그저 모형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예수님의 길을 따를 것입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고난을 견딜 것이고 오히려 십자가의 너머에 있는 축복의 소망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것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당하는 모든 부끄러움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쩌면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과 재력과 지위 등 세상에서 누리던 것들을 십자가로 인해 다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들고 있으면 당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당신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특히 요즘처럼 교회가 코로나의 진원지로 지목받는 시절에는 더욱 사람들의 기피와 비난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드디어 입을 열어 교회를 몰아내자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독 교회에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한 기업이나 유명한 회사에서 부패한 음식을 만들었다고 음식 자체를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한 직군에서 사기꾼이 나타났다 하여 그 직군 전부를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거짓말하면 변호사를 없애야 합니까? 의사가 잘못 수했다 하여 의사 자체를 없애야 합니까? 그런데 교회는 모조리 없애자고 합니다. 마치 폭염이 지속되니 태양을 없애자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지금 무엇을 말씀드립니까?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과 억울함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래도 당신은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셨습니까?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세상에 나서기로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토저 목사가 제시하는 십자가의 삶을 소개합니다.

첫째, 홀로 걷는 삶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홀로 걸었습니다. 대부분 외로웠습니다. 고독은 성도가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일종의 대가입니다.

인류 역사가 막 시작하려던 때에 이상한 어둠의 시기가 닥쳤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둠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경건한 사람 에녹은 사람들을 떠나 오직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보존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이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에녹이 동시대의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또 어떠합니까?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악하였습니다(창 6:5). 오직 노아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6:8). 아마 수많은 사람이 방주를 만든다고 몰두하는 그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보겠습니다. 물론 그에게는 아내와 조카와 종들과 목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깊이 읽은 사람이라면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거하면서도 외로운 별 같은 사람으로 홀로 거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엔 단 한 마디도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와 단둘이 있을 때 하나님은 무려 여덟 번이나 찾아오시어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희생 제사의 밤,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그 밤중의 시간에도 오직 아브라함만 그 장소에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모세도 400년이라는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홀로 지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과 주의 사역자들은 이렇게 고독이라는 세계를 운명처럼 만나 동행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홀로 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시 69:8)

그러나 누구보다 고독의 삶을 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실 때 그 누구도 주님의 고독함을 덜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셨고 홀로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셨습니다. 윌리엄 태펀이라는 분의 시 구절을 소개합니다.

“한밤중 감람산의 산마루에/며칠 동안 별은 흐렸다/한밤중 겟세마네 동산에서/고난의 주님이 홀로 기도하신다/한밤중 아무도 없는 데서/구주께서 홀로 두려움과 싸우신다/그분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조차 그분의 슬픔과 눈물을 생각하지 못하는구나”

자, 이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까? 주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적인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길이 고통입니다. 모든 즐거움은 세상 안에 있습니다. 모든 소소한 행복과 기쁨은 세상 안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동산으로 찾아오신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더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깊은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깊이 잠수하면 그 깊은 바다 밑에서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깊이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세상은 깊이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이 깊이를 찾아 하나님이 계신 곳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그 만남의 순간, 그 희열과 감격의 경험들은 세상의 그 어떤 것들을 다 합하고 합해도 견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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