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던 무리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게 되었지만 믿음의 근거가 ‘표적’이라는 것은 문제가 있다. 표적은 믿음의 동기가 될 수는 있어도 신앙의 목적이 되면 안 되는데 그 목적이 ‘자기 행복 추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 거저 신상 문제 해결자 정도로 믿었다. 마치 하나님을 자동판매기 취급한 것, 기복신앙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반응을 믿지 않으셨다(요2:24).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표적 신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리에 대한 남다른 목마름이 있었던 그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이라는 진리의 핵심을 말씀하신다. ‘거듭나야 하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방법,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니고데모가 찾아오다

요한은 바리새인이자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며 이스라엘 선생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한다. 성전 안에서 짐승들과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내쫓는 소란을 일으키셨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며 반발하고 항변하던 다른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고자 찾아온 것은 대단한 일이다.

당시 바리새인은 6천 명당 한 명의 비율로 구별되었다. ‘바리새’라는 말이 ‘구별된’이란 뜻, 당시 약 5천 명 정도의 소수 정예자들로서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정도였지만 율법을 준수하고 도덕적 수준이 매우 높은 ‘자칭 의로운 사람들’이다. 존경받던 사람들, 니고데모는 그중 한 명이었다. 게다가 대제사장 1명, 바리새인 30명, 장로 40명, 총 71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의회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다. 국회의 기능과 최고 종교재판소 기능을 하는 기관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이스라엘의 랍비, 선생이었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 학자, 그러니 현대인들이 동경하는 힘과 권력과 물질을 다 소유한 사람이자, 사상가요 문제 앞에서 답을 주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요한은 그가 찾아온 때가 ‘밤’이었다고 한다. 미천한 갈릴리 촌사람을 찾아갔다는 소문이 날까봐 타인의 이목이 두려웠을까? 아니면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시간대에 친밀하게 긴 대화를 나누려 했을까? 또 아니면 열정의 사람이었거나 진리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해석에 더 무게감이 느껴진다. 밤은 진리와 거리가 먼 혼돈의 상태, 이 세상의 혼돈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레온 모리스(Leon Lamb Morris)는 “흑암 속에서 살아온 니고데모가 그 빛을 보고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영의 세계와는 정반대,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유대 사회의 명망가이며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이 없는 사람, 성실하게 신앙생활하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생명 없는 어두운 상태’, 다시 말해 ‘영적 소경’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2절), 찾아온 건 혼자인데 ‘우리’라는 표현을 쓴다. 또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11-12절), 여기에는 ‘너희’라고 표현했다. 니고데모가 종교지도자들을 대표했던 바리새 유대주의자라는 뜻이다.

조금도 나무랄 데 없는 고매한 도덕성과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충분히 성실성을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지만 표적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 이유는 자신이 무능력에 빠졌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 가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절기마다 성전에 가서 예배드리기를 즐겼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방법을 모른다. 캄캄한 밤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저 물질세상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희망의 빛을 본다(2절).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저 분을 만나면 답이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갖게된 것이다. 그래서 깍듯이 예의를 갖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며 거의 아부에 가까운 인사까지 올린다.

하지만 물질세계에 빠져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물질세계에 갇혀 있는 현대인들에 대해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돈 5달러를 잃었을 때는 심각해지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를 잃은 것에 대해서는 심각해하지 않는다”는 말로 비꼬았다. 신앙 생활하며 뭘 기대하나? 부자되고 싶고, 건강해지고 싶나? 그런 복도 주어질 수 있지만 정말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려면 역세권에 땅 사는 게 더 낫고, 좋은 의사 만나는 게 더 낫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라 영혼의 평화와 만족을 주는 곳, 삶의 참된 의미와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곳이다. 영원한 세계에 대한 약속으로 우리가 좀 더 선하고 나은 삶을 살도록 이끄는 곳이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 재판이 잔인하게 행해지던 16세기 스페인 세비야 광장에 예수님이 나타난다. 늙은 종교 심문관은 그가 진짜 그리스도임을 알아보았다. 그런데도 그를 감옥에 가두고 화형시키려 한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거부한 것 때문이다. 대중들은 빵을 원하는데 예수께서 돌로 떡덩이 만들기를 거부하고 대중들에게 먹기 힘든 천상의 빵을 약속한 것을 문제 삼는다. 대중들은 “우리를 노예로 삼더라도 빵을 달라”고 외친다. 빵을 외면한 예수는 필요없다는 말이다.

니고데모, 남 얘기일까? 한국교회, 우리의 모습 아닐까? 한국교회는 노골적으로 기복신앙을 추구했다. 미신과 어리석음에 현혹되고, 교회의 크기와 건물을 자랑한다. 너무 권력과 힘을 추구한다.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물질세계에 빠져있다. 니고데모는 현대판 한국교회다.

하나님 나라를 원한다면

니고데모의 깍듯한 예의를 겉치레로 여기셨을까? 그의 영적 상태를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은 그가 정말 배고파하는 문제에 답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거듭나야 한다’(must be born again)고 동문서답 같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정곡을 찌르신다. 어찌 보면 니고데모의 찬사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좀 무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 아예 무시하신다. 니고데모는 즉각 의문을 제기한다.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 있사옵나이까”(4절), 유명한 오해의 코멘트, 이게 유대교의 한계, 밑천을 드러낸 거다. 의외로 그의 지적, 영적 수준이 너무 낮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된다. 서로의 관심사가 다르고 언어가 뜻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설마 예수님이 나이든 니고데모에게 모태에 다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을까? 이 ‘거듭나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노센’(ἅνωθεν 重生, radical rebirth), 요한이 즐겨 쓴 단어인데 ‘위로부터’와 ‘다시’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위로부터’라는 뜻이 더 우선이랄까?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다시 나는 거듭남, 영적 거듭남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물질적인 세계에 갇힌 니고데모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선생, 학자이지만 물질세계의 논리에 갇혔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플라톤(Plato)의 동굴의 우화와 다를 바 없다. 바깥 세계에 나가 참 빛을 보고 온 자와 여전히 사슬에 묶여 그림자만 보고 있는 자 사이에 발생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붕괴가 재연되고 있다. 알아듣지를 못한다. 그림자 세계의 언어와 논리로 이해하려 하는 게 문제다. 동굴 우화에서는 그림자 세계에 묶여 사는 사람들이 진리를 말하는 자를 죽이려 했다. 그러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신앙의 언어는 믿음의 언어다. 논리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하나님, 그리스도, 부활, 영생, 하나님의 나라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알게 되는 것, 이게 철학과 다른 면이다. 철학이 보이는 세계의 문제를 다루며 그것을 근본이론으로 추론하는 것이라면 신앙은 눈으로 검증할 수 없는 존재와 의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룬다. 그래서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고, 무조건 믿으라는 강요처럼 들릴 수도 있다.

파스칼(Pascal)은 그의 책 『팡세』(Pensées)에서 신앙의 우월성을 이렇게 증명하려 했다. 신앙은 사후의 세계가 없다면 ‘0’이고, 있다면 ‘전부’를 얻는 내기 같은 것인데, 없다는 데 내기를 건 사람은 실제 내세가 있다면 이 사람은 없다고 하였기에 전부를 잃게 될 것이고, 정말 없더라도 맞히긴 했지만 내세가 없기에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이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점수는 어떤 경우에도 ‘0’이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데 내기를 건 사람은 손해볼 게 없다. 실제 사후 세계가 있다면 이 사람은 ‘전부’를 얻게 될 것이고, 실제 없다고 할지라도 큰 상관이 없으면 그것으로 끝이니까. 뭐가 더 현명할까?

일본 가고시마현 출생인 후쿠시게 다카시(福重隆)씨는 하나님이나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였다. 세계 최초로 초박형 LCD를 개발한 주역인 다카시씨가 알고 있던 기독교 관련 지식은 검은 표지의 두꺼운 책이 성경이라는 정도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첫 개장한 나가노의 헤븐스키장에 휴가갔다가 스키장 정상에서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병원에 옮겨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2시간 30분. 그가 회생할 것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뇌의 50%가 이미 기능을 상실했고 그후 21일간 혼수상태로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그 사이 하나님을 만났느냐는 아내의 농담성 인사에 “만났지. 예수님이 나를 53년이나 기다렸어. 이 모든 것들은 준비되어 있었어. 나만 몰랐어.” 혼수상태로 위급하니 가족들에게 연락하라는 소리까지 듣고 사막 위에 쓰러져 죽기 직전이란 두려운 생각을 하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살려주세요”고 애원했는데 모래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이 아름다운 빛깔의 물을 주셨고, 그 물을 마시는 순간 엉치뼈 끝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마치 불기둥과 같은 강한 힘이 솟구쳐올라오는 뜨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다카시씨는 나사렛 예수께서 자신을 살려주신 이유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는 것, 특히 아이들을 위해 학교와 고아원도 세우는 것이라 했다.

전신마비나 반신불수, 언어장애로 살아야 할 상황, 희망이 없었지만 한국인 통역자 장혜림씨를 아내로 만나 인천에 있는 한방병원에서 놀라운 회복세를 보였고, 일본인 구원을 위하여 God-world라는 선교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100-1=0, 0+1=100”. 모든 것 다 가지고 있어도 단 하나, 예수님이 없으면 0, 인생이 꽝이지만, 아무것도 없어도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모든 것이 있는 것, 우리는 0+1=100과 같은 존재라는 말이다.

방법은 물과 성령이다

예수님은 알아듣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풀어서 설명하신다. 점잖게 설명하신 것,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물’과 ‘성령’은 이미 널리 알려진 해석이 요한의 회개와 침례(세례)를 연관짓는 것이었으나 김세윤 박사는 회개는 육의 세상을 부인, 회개하고 윗 세상의 힘 곧 성령에 의해 새롭게 나는 것이고, 물은 침례(세례)시 성령의 상징이라며 두 개를 하나의 개념이라 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구원의 정론(正論)이며 ‘소속의 변화’를 의미한다. 비록 니고데모가 유대사회의 명망가이며 성공한 부자에 학자였더라도 영치(靈痴)라는 사실을 안 예수님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생명’을 주려고 도전하셨다. “거듭나야 하리라”, 진리보다 편한 곳과 화려한 곳을 찾는 현대인들도 꼭 들어야 할 말씀이다.

이는 적당한 개혁이나 개선에 관한 말씀이 아니고, 뿌리째 바꾸는 개벽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돌배나무를 정성껏 길렀다. 영양분도 잔뜩 주고 잡초나 병충해도 제거하였다. 그 결과 풍성한 수확을 얻었는데 100배의 돌배를 얻었다. 이게 개혁의 결과다.

바리새파는 유대교의 개혁을 꿈꾸었다. 말씀을 연구하고 새롭게 적용하고 이것을 온 이스라엘이 실천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소망이 없다고 하신다. 인간적 개혁은 좀 더 나은 인간을 만들 뿐, 그 인간도 시간이 가면 또 다른 나쁜 인간으로 굳어지고 만다. 반면에 물과 성령으로 나라는 말씀은 철저한 개벽, 인간 존재 자체가 완전히 탈바꿈해야 한다는 것, 소망 없으니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라는 말이다.

한국교회, 그동안 여러 번 위기라는 경고음이 들렸다. 그런데 코로나 대유행 시기를 거치면서 성장과 선교가 쉽지 않은 시대를 맞았다. 차제에 교회의 미신성, 폐쇄성, 물질성, 권력성, 이념성을 반성해야 하는데 코로나 엔데믹 이후에도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세상성에 빠진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회는 더 이상 맘몬과 권력과 쾌락을 좇은 타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세속화도 공산화도 막고, 차별금지법도 동성애도 막아야 한다. 이런 일이 세상을 구원할 교회의 책임이고,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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