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넷째, 옷을 찢었습니다.

1) 옷에는 여러 기능이 있습니다.

① 먼저 알몸을 가립니다. 죄인은 자신의 알몸이 드러나는 것을 회피합니다. 알몸은 자신의 치부로 여깁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 부끄러움을 알게 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옷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옷을 찢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결연한 순종의 표현입니다.

② 다음으로 옷은 바깥세상에서 악천후의 피해를 막아 줍니다. 더운 날은 더위를 피하는 가벼운 옷이면 되고 추운 날에는 몸을 보호하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면 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 입는 복장을 입고 다니셨습니다.

③ 다음으로 옷은 장식품입니다. 육신은 원래 천한 것이라 천함을 가리는 육체적 장식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처럼 의복이 발달된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백화점에는 온갖 옷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도 새 옷을 입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는데 갑자기 안에서 왜 옷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단지 알몸을 가리면 되는 것인데 왜 패션을 찾고 유행 따라 옷을 바꾸어 입어야 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이 모든 것이 옷에 대한 탐심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앞으로는 지나치게 장식을 위한 옷을 자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절제의 은혜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④ 끝으로 옷은 성별과 신분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집니다. 옷차림을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있고, 신분이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는 거지가 신사복을 입고 부자는 헐렁한 청바지를 입는다 합니다. 또 우리 주변에는 남자아이 같이 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애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그러니 옷으로 남녀를 가린다는 것도 옛말인 듯 싶습니다.

2) 옷을 찢었다는 것은 마음을 찢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비탄에 잠긴 요시야는 “내가 왜 이런 옷에 갇혀 나의 본 모습을 하나님 앞에 숨겨야 하는가?”하고 생각하며 옷을 찢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백성들에 대해 진노하고 계신데 왕이란 사람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겸손하지 못한 자세입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노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알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진실함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결백과 진실함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간혹 옷을 자주 찢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관습이 없으므로 우리는 옷을 찢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욜 2:13)고 요청했습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된 슬픔이 아니라 가장된 외적인 슬픔의 표시로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안과 밖이 잘 아울러져야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한 쪽 팔이 다른 쪽 팔보다 길지 않을 때입니다. 모든 신체부위가 이런 균형과 조화를 가지고 만들어졌습니다. 외적 표현만 있고 내적인 참회가 동반되지 않은 것은 위선입니다. 어느 시인은 마음에도 없이 고개를 숙이는 갈대를 보고 겸손의 시늉만 한다고 노래했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님만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다섯째, 통곡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민감하고 마음이 부드럽고 유순하며 겸손한 사람은 먼저 자신의 죄악에 대해 슬퍼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곤란에 대해 함께 통곡합니다.

모세는 자기 동포가 이집트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보고 마음이 녹아 내렸습니다. 어느 날 한 애굽인이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을 괴롭히는 것을 보다 못한 그는 애굽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자신의 조국의 상황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방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 출신의 총독인 느헤미야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고국의 동포들을 보니 모두 큰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졌고 성문들은 불에 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앉아서 울기를 며칠 동안 계속했습니다.

오늘 요시야 왕도 이들처럼 통곡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므로 체면을 차리며 울지 않았습니다. 우는 일에 지위고하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울 수 있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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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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