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2) 연약한 마음은 부드럽고 여린 마음으로 하나님 자녀의 초자연적 성품의 하나입니다.

본래 우리 마음은 돌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일에는 매우 완고하게 저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성도들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육신적으로 접촉하고 느끼고 판단하기 일쑤입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인 일, 보통 살아가는 일들에는 너그럽고 성인군자같이 굴다가도 영적인 일, 초자연적인 일들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고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인간의 마음처럼 딱딱한 것은 없습니다. 차라리 짐승들이 말을 더 잘 듣습니다. 돌은 망치로 깨부술 수는 있지만 어떤 형체로 빚지는 못하듯이 인간의 마음도 깨부술 수는 있어도 빚는 작업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만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에서 마음이 완고한 자로 바로보다 더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에게 불순종한 대가로 무려 열 가지 재앙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 정도 혼이 났으면 바로가 마음을 고쳐먹었습니까? 아니요. 그는 오히려 재앙을 겪고 난 뒤에 열 배나 더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

우리는 진노 아래 태어나 영혼이 죽었던 자들입니다. 저주받은 상태에서 태어난 저주의 상속자였습니다. 지옥의 벌린 입은 언제나 이런 추악하고 더럽고 부패한 죄인들을 먹잇감으로 삼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악을 굉장히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스런 사람을 하나님이 바꾸십니다. 돌 같이 굳어 딱딱한 마음을 유순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불 같은 말씀으로 바위를 부스러뜨립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음에도 그가 마음을 돌이키지 아니하고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 거하는 자요 거듭나지 못한 자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뜨거운 태양열에 얼음이 삽시간에 녹듯이 부드러워집니다. 그렇게 깐깐하고 까탈스럽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유순해 집니다.

무엇보다 연약한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만들어집니다. 다이아몬드는 불로도 녹일 수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써 녹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완고한 마음을 녹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난 이후, 내일, 모레, 내 년에 계속 점진적으로 거룩해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덧입었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3) 우리가 연약한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네 가지 방편을 소개합니다.

① 제일 먼저 성령께 의존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빌 바를 모른 것 까지 다 아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간구를 드리시는 우리의 도우미십니다. 성령님께 나의 마음이 곤고해지거나 완악해지거나 딱딱해지지 않기를 소원하고 도움을 요청하시길 바랍니다.

② 성경을 읽고 쓰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일고 본받을 수 있습니다.

③ 양심에 어긋나는 일에 가담하거나 죄악 된 일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양심이 발동하여 마음이 아프고 아픈 마음을 오래두면 다시 굳어집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 무엇보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죄, 큰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큰 죄는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④ 되도록 마음이 연약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교만한 자들과 어울리면 자기도 교만해집니다. 세속적인 일, 육신의 정욕을 위해 쾌락과 방탕함에 취하면 헤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33살에 회심하기 전까지 이미 17살에 가출을 했고 19살의 나이에 사생아를 낳을 정도로 방탕했습니다. 저는 어거스틴의 생애를 돌아볼 때마다 이런 아들의 회심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한 어머니 모니카를 떠올립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식치고 훌륭한 자식은 없습니다.

셋째, 요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했던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시는 것은 교만의 자리에 앉은 인간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천하를 내려다보며 호령하고 지배하고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인간을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오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겸손은 단지 낮아지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인간에게 겸손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가 겸손을 들려야 하는 분도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의 겸손은 주권자이시고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듯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사람에게서 발견되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지할 권리가 없습니다. 무지하면 벼가 역지 못하여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교만을 부리는 자가 됩니다.

요시야의 겸손은 곳간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깨달았기에 가능한 인격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격이야 말로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로 주시는 초자연적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겸손을 요청하고 동시에 겸손하기 위해 부지런히 하나님에 관한 신적 지식을 갖추기를 열망하고 분골쇄신의 노력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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