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원장
이효상 원장

역사에서 저절로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역사에 비약도 없다. 우리 사회에서 오늘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도 언젠가 과거에서 필연적으로 그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근현대사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140여년을 지나는 시점이다. 우리가 커피를 마시는 것이나 양복을 입은 것, 전기를 사용하고 영화를 보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근현대사에서 ‘근대(近代)’란 무엇인가. 우리는 근대 사회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가. 우리는 근대를 어떻게 건설했으며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그런 과정에서 낙오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였는가.

현대사회는 SNS정보화 시대의 도래라 최근의 일이라 다들 잘 안다고 자신하지만 알고 보면 제대로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다. 정보의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듯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바로 알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상식 즉 주워들은 이야기 정도다. 우리는 지난 100여년 동안 경기도나 남양주시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대로 잘 알지 못한다. 오래 살아왔다고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새로 이사왔다고 아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나 지역의 역사만큼은 알고 살아야 한다. 자기가 살고있는 동네 이야기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곧 나를 아는 일이다.

“문화라 함은 살림살이의 꼴, 또 솜씨라고 규정해 두겠습니다. 개인이면 개인, 집단이면 집단, 민족이고 국민이고 그 생활을 경영, 유지,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사용한 방법, 작성환 양식, 재료를 가공하는 기술, 가치를 건설하는 능력, 이런 것들이 곧 문화입니다.”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선생의 ‘조선의 문화’라는 책에 기술한 글이다. 이렇게 역사를 이해하면 ‘역사는 문화의 기록’이 된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문화와는 차이가 있지만 개항기인 1880년대 황성신문에 보면 ‘문화’라는 말이 등장한다. ‘문화(文化)’라는 말은 컬쳐(culture)라는 말로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의미로 줄여 ‘문화’라고 했다. 또 새로운 문화에 대한 이해를 ’문명개화(文明開化)‘라 불렀고 ‘문명개화가 곧 문화’로 받아들여지는 시기가 1920대까지 이어졌다. “근래 우리 조선 사회에서도 문화생활이라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 이는 반드시 근대문명이라는 과학정신의 세례를 받은 후 ....”(개벽, 1923.2)라고 ‘문화생활’의 ‘문화’가 주먹구구식의 아닌 과학적이고 합리성을 기반으로 인식케 하는 그런 문화였다.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문화가 자리 잡아가는 과정으로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선 무엇보다 자본 즉 돈이 핵심이다. 따라서 문화가 돈을 말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 문화가 된다. 그러기에 문화는 대중성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문화도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그런데 고급문화를 표방하는 이들이 계속 대중문화를 따돌리려 했다. 하지만 대중문화야말로 자본주의가 낳은 적자(嫡子)였다. 무엇보다 대중문화가 급속히 팽창하면서 이제 대중문화가 어엿한 문화의 하나로, 나아가 문화 그 자체로 대접받고 있다, 그래서 대중문화는 엄연한 문화일 뿐 아니라 중요한 문화이며 나아가 우리들 삶의 모태가 되었다. 시민들의 삶의 질(quality of life)은 대중문화의 질과 동격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근대사회의 변화와 개혁의 아이콘(icon)이었던 다산 정신을 계승하는 다산문화예술진흥원은 시민들의 삶은 대중문화, 생활문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명제를 가지고 공감대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근대화 시대를 지나 현대 사회에 들어와선 의식주(衣食住)가 완전히 바뀌었다. 무엇을 먹느냐라고 했을 때 한식에서 양식과 외식으로, 무엇을 입느냐고 할 때 의관에서 패션으로 한복에서 양복으로, 어디서 자느냐고 한다면 한옥에서 아파트 문화로 바뀌었다. 사라진 것과 살아남은 것을 살펴보면 문화의 변천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예를 들어 다듬이질하는 소리나 온돌처럼 사라진 것은 꼭 잊혀져야만 하는 것일까. 다시 복원하여 생활문화의 기초가 되게 하면 안될까. 여기에 한식, 한복, 한옥, 한글이라는 우리만의 정체성을 가진 문화 회복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야 할 이유가 있다.

잊혀져 가는 사진 한 장의 추억과 기억 속의 모습, 그 하나하나가 모여 미래를 향한 문화의 빛깔을 만들어 간다. ‘찍고’, ‘쓰고’, ‘나누고’ 라는 쓰리고(3GO)가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 간다. 독창적이고 깊이 있는 문화를 만들 수 있었던 원천이 바로 우리 생활 주변의 작은 모습들 속에 담겨 있다.

지금의 대중문화는 ‘한류(韓流)’라는 이름으로 ‘세계화’를 선도하고 그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런 운동이 ‘한류문화(韓流文化)’의 기본이자 새로운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게 할 것으로 전망한다. 유행을 창조하는 것은 레트로(retro)가 아닌 뉴트로(new-tro)다.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뉴트로(new-tro)가 대세다.

아쉽게도 이 시대 대중문화는 10대들의 독무대다. MZ세대가 점령해 버렸다. 2000년대 전 출생한 밀레니얼 M세대와 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가 그들이다. 대중문화가 곧 10대, 20대들의 점유물이 됨으로써 다른 연령층의 많은 대중을 소외시키는 오류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대중문화에는 오히려 대중성이 빠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순수한 의미에서 바람직한 대중문화의 방향은 어디일까. 그 답은 어쩌면 기성세대보다는 신세대가 먼저 찾아낼지도 모르겠다.

문화예술도시 남양주시를 꿈꾸며 100만 특례시를 위해 상상 더 이상의 나래를 펼치려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이제 한번쯤 이것을 되돌아보아야 할 때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다시 다짐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미래를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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