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은혜의 차이점은 뭘까? 공통점은 또 뭘까?
픽사베이

[풍족한 은혜] 신학자 폴 틸리히 설교집 ‘새로운 존재’⑥-거룩한 낭비

³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⁴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⁵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⁶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⁷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⁸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⁹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4:3-9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인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녀는 예수님이 ‘좋은 일’(6절)이라고 말씀하셨던 낭비의 한 예를 제공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거룩한 낭비, 즉 풍성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낭비였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황홀경적 요소’를 대표하며, 반면 제자들은 ‘이성적 요소’를 대표합니다.

참으로 누가 이 여인이 행한 엄청난 낭비를 보고 분개했던 제자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가난한 자들을 돌봐야 하는 집사나 곤궁한 상태에 처한 이들을 알면서도 돕지 못하는 사회사업가나 중요한 프로젝트를 위한 기금을 모아야 하는 교회의 행정가들은 분명히 그들을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서적 삶을 잘 통제하고 있는, 또 여인이 했던 일을 하는 것을 하는 바보짓이며 심지어 범죄적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균형 잡힌 인격을 지닌 사람들은 분명히 그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p86

인간의 역사는 자신을 낭비했던 또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남자와 여자들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자신을, 다른 이들을, 그리고 물질을 낭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당화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그들의 넉넉한 마음 때문에 낭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연과 역사 속에서 그리고 창조와 구원 역사 속에서 그렇게 하시듯 그것들을 낭비했습니다.

...(중략)...

개신교는 성인들과 신비주의자들의 낭비적인 자기포기를 잃어버림으로써 아주 많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베다니의 제자들처럼 늘 합리적인 목표만을 추구하는 종교적·도덕적 실용주의의 위험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p87-88

우리는 어린 시절의 사랑의 결핍이 정신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낭비하는 경험의 부족이 똑같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한때 풍성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과 인습과 엄격한 자기통제가 그런 마음을 억눌렀고 그 결과 그들의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풍성한 마음, 자기를 포기하는 낭비, 그리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성령을 억누르지 마십시오. 당신의 시간과 힘을 유용하고 합리적인 것만을 위해서 탐욕스럽게 보존하지 마십시오. 낭비처럼 보이는 것의 한 가운데서 나타날지도 모를 창조적인 순간을 향해 자신을 열어놓으십시오. 베다니의 그 여인이 했던 것처럼 하고자 하는 당신 내부 충동을 억누르지 마십시오.

p89

예수님이 하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인해 제자들의 합리적인 도덕은 역설이 되고 맙니다. 메시아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자신을 낭비해야만 합니다.

...(중략)...

십자가는 거룩한 낭비, 즉 황홀한 포기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장 완벽하고 가장 거룩한 낭비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 행위, 즉 이성적인 섬김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원의 계획안에 있는 모든 지혜의 완성입니다. 십자가의 자기 포기적인 사랑 안에서 이성과 황홀경이 그리고 도덕적 순종과 거룩한 낭비가 결합됩니다.

p91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1886년 8월 20일 독일에서 출생해 베를린, 할레, 브레슬라우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1911년 신학전문직학위를 취득해 대학에서 가르칠 자격을 얻었다. 제1차세계대전 기간 중 4년간 군목으로 참전하면서 ‘터전의 흔들림’으로 표현될 만한 사상적 변화를 겪었다. 1929년에는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정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치는 그가 유대인 학생들을 도운 것을 문제 삼아 그의 교수직을 박탈했다. 위기에 처한 틸리히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친 것은 미국의 유니온신학교였다. 이미 40대 중반에 접어든 틸리히는 낯선 땅에서 영어를 익히면서 강의를 했다. 그의 강의에는 그에게 주어진 ‘20세기 최대의 신학자’라는 칭호에 걸맞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유니온신학교에서 퇴임한 후 그는 1955년부터 1962년까지 하버드대학의 특별교수로 초빙되어 신학부 박사과정 학생들을 위한 세미나를 인도하여 집필 활동을 했다. 1965년 10월 11일 시카고대학 신학부 주관 초청 강연 도중 심장에 고통을 느껴 병원에 이송됐다. 이후 10월 22일 투병 중 숨을 거뒀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조직신학’, ‘존재에의 용기’ 등 다수가 있다.

출처 : 새로운 존재(폴 틸리히 지음, 김광남 옮김, 뉴라이프 출판사)

1955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본 책은 폴 틸리히가 뉴욕 유니온신학교, 코네티컷 주 뉴런던에 있는 코네티컷 대학 등지에서 했던 설교 모음집입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폴틸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