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3.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세력들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그런데 근자에 들어 개신교회 안에 이신칭의를 부정하고 한국교회를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리고자 시도하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중심에 소위 ‘유보적 칭의론자’(reservation of justification)들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김세윤 교수와 그 제자인 권연경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이신칭의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일단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이신칭의만 강조한 끝에 교회의 심각한 타락을 불러왔다고 진단합니다. 그들은 망령되게도 이신칭의의 교리가 ‘이 시대의 면죄부’요 ‘값싼 은혜’라고 공격합니다. ‘오직 믿음’만 강조하다 보니 신자들의 거룩한 행위가 실종되었다고 고발합니다. 그래서 칭의는 거룩한 삶과 함께 보고 판단되어야 할 문제로서 칭의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종말에 가 봐야 알 수 있다고 하는 ‘칭의 유보론’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칭의를 받은 사람이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는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견 일리가 있는 듯 해 보이나 그 숨겨진 의도를 들여다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행위란 믿음의 보충이거나 칭의의 조건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유보론자들에 의해 “크리스천도 지옥 갈 수 있다”고 하는 이상한 주장들이 한국교회 안에 버젓이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들 간에 “예수 믿어도 구원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뭐하러 교회 다니고 예수 믿겠는가?”하는 의문이 들불처럼 번진 것입니다. 이에 제가 몸 담고 있는 개혁신학포럼이 주동이 되어 세미나와 논문발표 등을 통해 칭의유보론자들의 주장의 맹점과 사악함을 고발하고 이신칭의 교리의 정당함을 변호한 바가 있습니다.

칭의란, 하나님이 우리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판결하시고 선언하시는 행동입니다. 다시 말해 칭의의 선언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하고 의롭고 정단한 신앙의 행위들, 이타적인 사랑과 선행과 공로 등의 조건을 보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내리시는 즉각적이고 단회적이고 영원한 판결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칭의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칭의란 엄밀한 의미에서 법적인 선언입니다.

이 선언으로 죄인은 두 가지 변화를 받습니다. 하나는 죄인의 죄가 모두 용서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한 과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면 어떤 죄인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합니다. 다음은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굉장히 큰 죄인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 무죄 하시므로 그 사람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저런 사람을 어째서 의롭다고 하시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있을 때 어떤 평가를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내 머리로는 나의 양심과 이성적 판단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일이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머리로 이해를 해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의 한계가 있다면 바로 이성의 능력 밖의 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차원을 초월해 계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자기 능력과 재주를 제아무리 뽐낸다 해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 놀 뿐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이 주인의 명령에 대해 “제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요”, 혹은 “그런 명령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등등 우기고 불평하고 불순종한다면 아마 주인은 그 녀석을 추방하고 말 것입니다.

4. 결어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는 기독교의 심장이요 기독교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교리”라고 설파하였습니다. 참으로 깊은 혜안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신칭의에 대한 여러 흠집 내기와 공격들을 바라보면서 왜 사단이 이 교리를 허물려고 하는가를 여실히 알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세례와 함께 불같은 그 무엇이 내게 임하면서 마음의 회심과 회개와 뜨거운 눈물을 경험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나’라는 존재는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정말 추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나아가 내가 의롭다고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될 수 있는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하찮은 자임에도 나를 불러 주시고 믿음을 선물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의롭다 해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시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유업들을 이을 상속자로 삼으신 하나님 은혜에 목이 메어 밤새 울었던 우리입니다. 이런 우리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손에서 놓을 수 있다고 봅니까? 천만에요. 사단이 제아무리 우리 손에 있는 이 위대한 보물을 빼앗으려 한다 해도 하나님의 성령은 절대로 사단의 책략을 놓치거나 저들의 시도가 성공하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중 마지막 하나 더 추가할 것은 우리는 율법을 순종하는 일에 철저히 실패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 롬 10:5)고 요구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영원히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영원히 죄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넘어서 율법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길입니다. 이 길에 있어서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복음 안에 승화시켜 동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지시하는 모든 요구사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기 처분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모델하우스는 사라졌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모델하우스가 보인 구조와 내용과 하등 다를 것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복음의 길에는 오직 자랑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일러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칭하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맏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루었습니다. 다음에는 바로 이 속죄의 은혜와 그것의 전가를 다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덕분으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후로 자기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해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자기 인생을 살려 하면 실패가 찾아오지만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자는 번성하고 성공하고 복을 누립니다. 그런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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