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1947년 2월, 사해 연안 쿰란 지역에서 양을 치던 베드윈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다가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 혹시 양이 있을까 하여 동굴 안으로 돌을 던졌다가 쨍그랑하는 소리를 듣는다. 기어들어갔더니 항아리 8개가 있었고, 그 안에 아마포로 싸인 가죽 두루마리가 있었다. 베드윈 목동은 이것을 가져가 베들레헴 골동품상에게 1달러를 받고 팔았다.

그 후 소문을 들은 고고학자가 현장을 방문하여 두루마리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주전 150년경 이곳에 살던 유대인들이 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 세계적인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이사야 66장 전권, 고고학자는 그것을 100만 불에 샀다. 그때로부터 이 쿰란지역에서 성경 사본 발굴운동을 시작해서 몇 년 동안 모두 800개의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구약을 포함하는 것, 지금도 이스라엘 박물관에 가면 그때 발견된 항아리와 성경 사본이 보존되어 있다.

베드윈 목동은 100만 불, 아니 1000만 불짜리를 단 1불 받고 팔았다. 가치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 쿰란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내게 있는 보물의 가치를 아는가?”라고 묻고 싶다. 성경이 최고의 책이고, 성경 속의 주인공 예수님은 영롱한 보물이신데 그것을 알고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시카고의 DL 무디 목사 교회의 18세 된 젊은이는 예수 잘 믿으려고 애를 써도 구원과 영생에 대해 늘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무디 목사를 찾아가서 “목사님, 제가 죽으면 천국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늘 불안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무디 목사는 “요한복음을 읽게” 그러시면서 한 구절을 따로 소개해주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요한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 그러면 그 말씀은 밑줄 쳐야 한다. ‘아멘 아멘 레고 휘민’(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말씀의 진실성과 신적 권위를 밝히기 위해 ‘아멘 아멘’을 두 번이나 먼저 선언하셨다. 꼭 믿어야 할 중요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앞으로 얻을 것이라는 말씀도, 얻었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또 얻을지 못 얻을지 모르겠다는 말씀도 아니다. ‘이미 얻었다’, ‘이미 구원 받았다’는 말이다.

함께 말씀을 본 후 무디 목사가 물었다. “너 예수 믿니?” “예, 믿습니다.” “그러면 영생 얻었니?” “목사님, 그걸 잘 모르겠어요.” “그럼, 다시 읽어 봐!” 다시 읽자 “너 예수 믿니?” “제가 믿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영생 얻었니?” “글쎄, 그걸 잘 모르겠다니까요.” “다시 읽어 봐!” 또 읽혔다. 그래도 영생이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젊은이에게 무디 목사는 “하나님이 얻었다 하시면 얻은 것이지 니가 뭔데 감히 하나님을 의심해!”하고 소리쳤다. 정신이 번쩍 든 젊은이는 ‘내가 믿는 것은 틀림없잖아. 내가 믿으니까 영생이 있는 것…’ 깨닫는다. 젊은이는 너무 좋아 그 후부터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고, 신학교까지 갔고, 결국 무디 목사 교회의 후임목사가 되었다. 그가 바로 존 윌버 채프만(J.W. Chapman)이다. 한국에도 다녀갔고, 그는 평생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는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준 유명한 부흥사다.

성경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라고 했다. 바이러스로 생명의 위협이 심한 시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예수 안에 생명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에서 그는 예수님,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그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 자신이 영원한 생명 자체이시고, 모든 생명의 산출자이자 주인이시다. 그래서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만일 생명(the Life)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아예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은 요한1서에서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요일1:1)라고 했다. 마치 심장을 손에 쥐듯 그 생명의 말씀을 보았고 들었고 손으로 만졌다는 것인데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라고 했다.

침신대에서 교수하다가 수원서 목회하는 친구목사는 딸만 둘이었는데 나중에 아들 둘을 더 낳았다. 그래서 “전도하기 힘든데 잘하긴 했다마는 키우려면 고생 좀 하겠다” 그랬더니 “이 목사,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하셨는데 이 목사는 어쩌누?” 그러며 농담을 걸어왔다. 그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 5장에 가면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5:26)고 했다. 하나님께서 예수께 생명을 주셨는데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님은 생명을 주기도 하고 죽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며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주인이시다.

요한은 이어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 했다. 빛이 뭔가? 생명을 낳는 힘 아닌가.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은 우리의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큰 위로이자 인류의 소망이 되신다. 그 생명과 진리와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이보다 더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명해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기억하자. 예수 안에 생명 있다.

생명을 위하여 오셨다

레온 모리스의 성경주석인 『뉴 인터내셔널 요한복음』에 보면 “복음서는 부단히 말씀을 생명과 연관시킨다”고 했다. 요한의 개성있는 중요개념 중 하나라며 ‘생명’이 요한복음서에만 36회, 신약 전체의 1/4이상의 횟수임을 강조했다. 요한이 예수님을 ‘주시는 분’(Giver),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분’으로 소개했다는 것이다(10:10, 3:16, 6:51, 6:53).

그리고 아들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5:40), 이 생명은 세상이 멸망케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10:28). 그렇다. 예수님은 권세 있는 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시다(10:18).

요한은 계속해서 ‘예수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증거한다. 요한의 생명은 영생(Eternal Life), 영생은 하나님이 주신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비싼 선물인데 예수님은 그 생명의 주가 되신다. 심지어 장례까지 치른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다(11장). 죽거나 활력을 잃어버린 생명들에게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오신 것이다. 성경을 보라. 그분의 I am, 이름이 곧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 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고 하셨다. 생명이 곧 건강이고, 활력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치 최고의 보약을 먹는 것과 같지 않겠나.

1세기 말과 2세기 초의 대표적인 교부라 할 수 있는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축사된 빵은 불멸을 주는 약이자 영적 죽음의 해독제”라 했다. 주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몸과 영혼에 영생과 건강을 가져다주는 불사의 약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나 이 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예배가 끝나고 모두 퇴장한 후, 침(세)례 받고 성결한 생활을 한 사람만 남아서 주의 만찬 예식을 따로 진행했다. 그리고 몸이 아프거나 감옥에 갇혔거나 다른 사정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성도들을 위하여 집까지 찾아가서 만찬의 빵을 나누기도 했는데 이것이 심방의 기원이다. 이그나티우스는 화채설로 믿었고, 우리는 빵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은 분명하다.

또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라 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 누구보다도 생명의 위협을 많이 느꼈던 다윗은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로다”(시36:9)라고 했다. 우리는 생명의 원천이자 세상의 빛이신 예수 안에서 빛을 볼 사람들이다. 내 안에 생명 있음을 믿고, 생명 얻은 자답게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명력 있게 살자

늘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고아가 있었다. “저는 버려진 아이예요. 아무도 저를 원하지 않는데 살아서 뭣해요?” 아이의 말에 고아원 원장이 돌 하나를 주며 말했다. “내일 아침 이 돌을 시장에 갖고 가 팔아 보렴. 그런데 진짜로 팔면 안 된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절대 팔지 말고 다시 가져와라” 이튿날 시장 구석에 있는 아이에게 의외로 많은 사람이 그 돌을 사겠다고 몰려들었다. 아이는 흥에 겨워 돌아왔다. 원장은 내일은 황금 파는 시장에 가서 팔아 보라고 했다. 그곳에는 어제보다 10배나 고가로 그 돌을 사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높은 가격을 불러도 안 팔겠다고 하자 희귀한 돌이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신이나 돌아온 아이에게 원장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명의 가치는 그것을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달라진단다. 이 돌은 특별하지는 않지만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며, 팔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높아진 것이란다. 너 자신도 이 돌과 같아. 네가 자신을 귀하게 여길 때 비로소 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단다” 『행복한 동행』에 실린 글이다.

지금부터 한 100여년 전에 미국의 한 마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다. 한 할머니집도 전기시설을 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계량기가 그대로였다. 검침원이 “할머니, 전기를 거의 안 쓰셨네요?”라고 묻자 할머니가 대답하신다. “응, 쓰긴 쓰는 데 촛불 켤 때만 써”.

방치하라고 주신 생명이 아니다. 쓰지 않는 전기가 소용없듯이 쓰지 않는 생명은 능력이 없다. 생명력 있게 살아야 한다. 통계에 보니 코로나로 인한 전 세계 사망자가 5월 11일 오전 현재 6,867,317명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자살률이 수년째 계속 OECD 1위다. 자살 공화국, 심지어 자살이 미화되는 나라라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심각하다. 생명이 가장 소중한데...

요한은 생명에 대해 계속 강조한다. 왜 사도 요한이 서두에서부터 생명에 대해 이렇게까지 강조할까? 그냥 소중하기 때문에? 아니다. 우리가 죽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생명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적 생명도 생명이지만 요한의 초점은 영적인 생명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요한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있다고 한다. “무슨 소리?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적어도 100세까지는 살 것 같은데?” 항변할지 몰라도 성경은 그것을 살아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죽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 인간을 보는 방식인데 우주에 로고스가 있다.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는 우주의 이성이요 법칙이고, 인간의 영혼은 이 로고스의 파편이다. 그래서 이성적이고 신을 그리워한다. 이 영혼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살면서 자기 존재의 근원을 잃어버렸는데 이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 존재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요한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것,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생명의 끈이 하나님과 연결된다고 했다. 그래서 얻은 것이 영생, 우리는 우리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양식은 이 땅의 양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 하지만 이렇게 얘기하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cartes)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한 말에는 쉽게 공감한다. 다르지 않다. 인간답게 사는 것은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 의식이 고향을 잃어버렸다. 그게 죽음이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를 보면 아버지 집을 떠나면 자유롭고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돼지보다 못한 인생이 된다. 바로 그때 의식이 돌아오는데 그때 탕자가 했던 말이 뭔가?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 우리의 의식은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만 사는 것이다. 그때라야 우리 영혼은 진짜 행복을 누리는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게 생명 때문이다.

육이라는 고깃덩어리만 생각하지 말라. 인간이 육적인 존재이기만 하다면 그렇게 배가 터질 것 같이 먹고도 왜 계속 배가 고플까? 도대체 자살하는 이유가 뭘까? 고깃덩어리로 채워지지 않은 허기가 있기 때문 아닌가? 인간은 영적 존재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주리지 않는다. 영의 뜻을 따라 살아야 참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집 나간 영혼을 찾아 이 땅에 오셨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 그분 안에 참 행복이 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참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아야 생명력 있게 살게 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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