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국가와 정치

1. 예수의 공식(公式):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복음서 저자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시험한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 22:17). 이것은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었다.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면 로마 정부에 반대하는 자가 되어 헤롯 당원들에게 “반역자”라고 고발할 거리를 제공하며, 바치라고 하면 로마 정부에게 세금 납부를 반대하는 유대인들, 특히 열심당원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의 빌미를 제공한다.

예수는 지혜롭게 대처하신다. 예수는 화폐를 가져오라고 하시고 거기에 씌어진 형상과 글을 보시면서 이것이 뉘것이냐고 물으신다. 제자들이 가져온 화폐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있으며 로마의 글이 씌어 있었다. 예수는 이것을 보이시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라고 대답하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이사의 통치를 인정하신 것을 시사한다. 가이사의 통치도 하나님의 주권적 위임(委任)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세금(稅金)을 낼 것은 내어야 한다. 그러나 가이사가 넘겨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것”이 있다. 그리고 성전세와 십일조를 비롯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종교적 부담금은 종교당국에 납부해야 한다. 그럼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된다. 여기서 저 유명한 예수의 공식이 나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2. 예수는 빌라도에게 “나는 왕”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복음을 전파하시다 종교 당국자들에 의하여 로마 가이사에 대항하여 군중을 선동한 죄목으로 고발된다. 예수는 체포되고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당한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고발된 예수를 심문하고 난 후 그를 백성들 앞에 세우고 말한다: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요 19:6).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 하나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정치적으로 충동한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 19:12). 유대인들은 군중심리에 사로 잡혀 예수에 대한 십자가의 형을 요구한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요 19:15). 이에 대제사장들도 합세한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

예수에게 붙여진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은 예수의 죽음이 갖는 정치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묻는다.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요 18:37a). 예수의 이 대답은 정치적인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다. 예수는 평화의 왕이요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는 정치적인 왕이 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그의 메시아적 사역에 있어서 한번도 정치적인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일을 도모한 적이 없었다.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수행했던 것이다.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다”는 그의 말씀에서 예수가 분명한 메시아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메시아적 사명과 사역은 그의 진정한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가이사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모반을 선동하는 자로 오해될 수 있었다.

V. 예수가 추구한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정치적 급진주의(political radicalism) 아닌 종말론적 급진주의(eschatological radicalism).

복음서 저자 요한은 재판정에서 유대 총독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한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전해주고 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예수는 자기의 나라는 분명히 로마제국이 다스리는 이 세상이 아니라고 천명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것을 말한다: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 여기서 예수가 자신을 지칭한 왕이란 이 세상의 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왕이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뜻이다. 재판정에서 하신 예수의 증언은 그가 여태까지 증언하신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와 이에 대한 기대와 준비를 선포하는 종말론적 급진주의(eschatological radicalism)에서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결코 열심당(the Zealots)이 시도한 정치적 급진주의(political radicalism)는 아니었다.

스위스의 신약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그의 저서 『예수와 혁명가들』(Jesus and the Revolutionaries)에서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왜곡하는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예수상에 대하여 “아니다”고 주장한다. 쿨만에 의하면 정치와 사회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종말론적 급진주의(eschatological radicalism)였다. 예수의 관심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었다. 이러한 종말론적 급진주의는 한편으로는 로마의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의 점령세력에 대하여 정치적 저항운동을 거부하는 이중적 태도(double attitude)를 취하였다. 쿨만은 예수의 종말론적 급진주의를 당시의 열심당(Zealots)의 정치적 급진주의(political radicalism)와 비교하면서 양자의 다름을 지적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선포하고 거기에 대한 대망과 준비를 촉구하였다. 이에 반해 열심당은 무력봉기를 통하여 로마의 점령세력을 타도하고 이스라엘의 해방과 독립, 곧 정치적 왕국의 실현을 위하여 저항하고 투쟁하고자 하였다. 사도행전 1장에도 부활한 예수를 추종하는 제자들 가운데 정치적 왕국의 회복을 염원한 자들이 다음같이 질문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이에 예수는 다음같이 대답한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 7-8). 예수는 열심당의 노선을 동정했으며, 드러내 놓고 이들을 비난하지는 않았으나 결코 이들과 동조하지는 않았다.(Oscar Cullmann, Jesus and the Revolutionaries, 고범서 역, 『예수와 혁명가들』, 범화사, 1984, 7-9, 44-65).

예수가 증거한 나라는 이 세상 나라, 유대왕국이나 로마제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예수가 증거한 나라는 칼과 창으로 빼앗고 쟁취하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중세의 십자군 운동은 전형적(典型的)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실현하고자 오해한 중세 기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정치 군사적 운동이었다. 십자군 운동은 총과 칼에 의한 무력적인 점령과 정복이었고,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야기시켰다.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관계 설정에 상처를 야기시켰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나라는 행정시책을 반대하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데모나 촛불 시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세력과시를 위한 기도회나 파당(派黨)적인 이해관계를 지닌 무리들이 모인 정치성을 띤 집회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나눔과 평화의 운동이며, 사회적으로 약하고 소외된 자를 세워주고 이들과 나누고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파편적으로 실현된다. 기독교가 전파한 하나님 왕국은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전도(顚倒)된 왕국(upside down kingdom”이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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